||<-2><table align=center><tablewidth=650><table bordercolor=#000000><bgcolor=#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디에고 리베라 프로필.jpg|width=100%]]}}} || ||<-2><bgcolor=#dddddd> {{{+2 '''디에고 리베라'''}}} [br] {{{+2 '''Diego Rivera'''}}} || ||<width=100><bgcolor=#999999> '''{{{#black 본명}}}''' ||<bgcolor=#ffffff>디에고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온 후안 네포무세노 에스타니슬라오 데 라 리베라 이 바리엔토스 아코스타 이 로드리게스[br]Diego María de la Concepción Juan Nepomuceno Estanislao de la Rivera y Barrientos Acosta y Rodríguez || ||<bgcolor=#999999> '''{{{#black 국적}}}''' ||<bgcolor=#ffffff>[[멕시코]] [[파일:멕시코 국기.svg|width=30]] || ||<bgcolor=#999999> '''{{{#black 출생}}}''' ||<bgcolor=#ffffff>[[1886년]] [[12월 8일]], [[멕시코]] 과나후아토 주[* 광산도시로 불린 곳이다.] || ||<bgcolor=#999999> '''{{{#black 사망}}}''' ||<bgcolor=#ffffff>[[1957년]] [[11월 24일]] (향년 70세), [[멕시코시티]] || ||<bgcolor=#999999> '''{{{#black 직업}}}''' ||<bgcolor=#ffffff>[[화가]] || ||<bgcolor=#999999> '''{{{#black 배우자}}}''' ||<bgcolor=#ffffff>안젤리나 벨로프^^(1911년~1921년)^^[br]과달루페 마린^^(1922년~1928년)^^[br][[프리다 칼로]]^^(1929~1939년) (1940년~1954년)^^[* 1939년에 이혼을 했으나 1년 후 다시 재결합을 했다.][br]엠마 우르타도^^(1955~1957년)^^ || [목차] == 개요 == [[멕시코]]의 [[화가]]. 생전에는 멕시코 미술계의 거장으로 유명하였다. == 상세 == 생전에는 멕시코 미술계의 거장으로 유명하였으나 사후에는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 훨씬 유명하다. 아래 후술할 여성편력으로 인해 그녀와 사이가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프리다와 결혼 후에 여러 이야기를 많이 남겼으며 다양한 작품도 남겼다. [[1954년]] [[7월]] 프리다가 먼저 사망한 후 3년 4개월 뒤인 [[1957년]] [[11월 24일]], [[뇌일혈]]로 저택에서 사망한다. 죽기 전 화장되어서 프리다의 곁에 있고 싶어했지만 그 [[유언]]은 이뤄지지 않고 돌로레스 유명인사 묘지에 매장되었다. == 일생 == === 유년기 === 어려서부터 디에고 리베라는 사람들에게 [[엔지니어]]로 불렸는데 [[장난감]]을 뜯어 붙이는 솜씨가 뛰어나고 [[전차]]와 [[기차]] 그리는 것을 좋아하며 기계장치를 상상하고 그리는 것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되었을 때에는 거리에 있는 작은 [[판화]] [[공방]]에 흥미를 느낀다. 그때 당시 세상 소식을 주로 장터의 [[노래꾼]]이나 [[떠돌이]] [[시인(문학)|시인]], 기도문, 낱장짜리 인쇄문이었는데 판화는 그 인쇄물에 붙는 그림이었다. 그렇게 디에고는 판화의 세계에 매료된다. 후에 [[이탈리아]]에 가서 [[14세기]] [[프레스코]] 작품을 봤을 때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었다고 한다. 10대 후반에는 4년 동안 산 카를로스의 진부한 커리큘럼과 유럽식 회화 기법의 답습에 반항하고 멕시코 [[농촌]]을 오르내리며 [[집]]과 [[거리]], [[교회]], [[인디언]], [[화산]] 등을 그렸다. === 청장년기 === [[1908년]] 22살에 리베라는 멕시코를 떠나 유럽으로 향한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디에고는 스페인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친 [[엘 그레코]]와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19세기]] 후반 그때 당시 [[무정부주의]] 사상이 널리 퍼진 스페인에서 디에고는 전단지와 소책자를 사들였다. [[도서관]]에서는 [[니체]], [[쇼펜하우어]], [[드레퓌스 사건]]의 '나는 고발한다'를 쓴 [[에밀 졸라]], [[프랑스]] 노동이론가 [[소렐]] 등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는데 이는 디에고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이후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을 돌아다녔으며 [[런던]]에서는 부둣가, [[빈민가]]인 이스트엔드, 변두리 [[공장]] 지역에서 스케치를 쉬지 않았다. 빈민들이 일을 끝내고 런던 브릿지를 건너 [[템스 강]]둑에서 잠드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다. [[1910년]] [[혁명]]이 시작된 멕시코에 잠깐 들른 것을 제외하면 그는 주로 [[파리(프랑스)|파리]]에 거처를 두고 [[1920년]] [[겨울]]까지 10년간 유럽에서 지냈다. 파리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모딜리아니]]와 사귀면서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파리에는 러시아에서 온 [[작가]], 화가, [[사상가]]들이 많았다. 그리고 디에고는 그때 첫번째 아내인 안젤리나 벨로프를 만났으며 [[러시아]] 망명자들과 함께 [[정치]], [[혁명]], [[예술]]의 이상에 관해 토론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파리는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에 기반한 [[시]]와 노래, 잡지 또는 [[기계]]와 [[노동자]]를 그린 [[페르낭 레제]]의 작품이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리베라를 사로잡은 것은 1920년 이탈리아에 갔을 때 본 14세기 프레스코 작품들이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비잔티움]]과 [[에게 해]]의 [[모자이크]] 조형 예술을 받아들여 화법을 발전시켰고 프레스코는 그중에서도 엄청난 문화유산이었다. 프레스코를 처음 접했을 때 리베라는 이미 30살이었고 화가로서 수련기를 어느정도 지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시에나에서 지오토,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같은 대가들의 전쟁화나 역사화를 꼼꼼히 공부했다. 프레스코는 화폭이 거대하고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으며 화랑 안에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그림과는 차원이 다르게 보였었다고 한다. 리베라는 프레스코에 그려진 사람들의 신체 표현 방식이나 동작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또한 프레스코 전체의 구조를 튼튼하게 만들고 벽의 배색과 장식을 어울리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는데 힘썼다. 1921년 멕시코로 돌아온 리베라는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하는데 보는 것마다 나의 잠재적 걸작이었다고 한다. 군중, 시장, 축제, 행진하는 부대,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 들판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온통 빛나는 어린아이들. 나의 스타일은 아이가 태어나듯이 그 순간에 태어났다고. 무엇보다 공공미술에 강한 신념을 가졌는데 때마침 혁명 정부는 미술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벽화 제작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프로젝트의 첫번째 과제는 [[멕시코시티]] 교육부 건물 전체의 내부를 장식할 벽화였다. 수년 후 이들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 교육부 건물의 벽화 작품은 이탈리아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유럽 회화 특유의 우아하고 가는 선, 격조 있는 걸작들과는 판이한 멕시코 벽화 [[르네상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참고로 그때 당시 리베라 말고도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시케이로스 등 다른 외국 화가들도 벽화 제작에 참여했었다. ||<table align=center><tablewidth=650><table bordercolor=#000000><bgcolor=#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La_Gran_Tenochtitlan.jpg|width=100%]]}}} || || '''멕시코 대통령궁 벽화, [[1945년]]'''[* [[아즈텍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의 시장을 묘사하였다. [[벽화]] 문서의 이 그림 또한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이다.] || 리베라는 오로스코와 함께 인종과 [[정복]]의 서사시를 그렸다. 교육부 지상층의 디에고의 벽화 중에서 3개의 그림이 특히 인상적인데 하나는 [[광산]]으로 일하러 들어가는 노동자들, 다른 하나는 [[설탕]]을 휘젓고 있는 일꾼들이다.[* 중남미의 설탕 제조업은 뜨거운 설탕 가마 앞에서 고단한 노동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아름다운 푸른색으로 아마포를 물들이고 있는 테오틸루아칸 여인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벽화 작업을 하던 도중 [[1927년]] [[자화상]]으로 유명한 [[프리다 칼로]]를 만나게 되었는데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의 화가로서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어린 시절의 사고와 10대의 [[교통사고]]로 상처를 받은 칼로를 격려하고 프리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9년]]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결혼]]한다. 그러나 리베라의 여성편력으로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고 [[1939년]] [[이혼]]했다 1년 후 다시 재결합을 한다. === 노년기 === [[1930년대]] 리베라는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옮긴다. [[1920년대]] 말 리베라, 오로스코의 벽화 그림들이 미국에 알려졌고 미국은 [[1929년]] [[대공황]]의 시작과 함께 대중 예술 지원 정책을 세운다. 이로 인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다수 대중을 위한 미술'이라는 개념이 생격났다. [[1930년]] 칼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리베라는 오래된 예술인 마을 [[몽고메리(도시)|몽고메리]] 거리에 [[스튜디오]]를 두고 일하면서 미국의 문화를 높이 평가했다. ||<table align=center><tablewidth=650><table bordercolor=#000000><bgcolor=#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록펠러 센터 벽화.jpg|width=100%]]}}} || || '''록펠러 센터 내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 [[1932년]] 리베라는 중서부 공업 도시 [[디트로이트]]로 자리르 옮긴다. 굴지의 기업가 [[헨리 포드]]의 주문으로 디트로이트 미술학교에 노동자들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33년]]에 완성된 이 벽화는 미국의 공업화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리베라 자신도 자신의 주요한 작품으로 인정할 정도. 그러나 이 프레스코 벽화는 급진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1933년 [[록펠러]] 가문에서 뉴욕 [[록펠러 센터]] 안을 장식할 벽화를 주문했을 때는 리베라는 그 벽화에 [[20세기]] [[사회]]와 정치, [[산업]]과 [[과학]]의 가능성을 모두 그리고자 했다. 록펠러 센터 내 RCA의 그림 속에는 노동자들이 벌이는 거대한 메이데이 행진이 들어갔다.[* 뉴욕은 사실 메이데이 창설과 연관이 깊은 도시였다.] 그런데 이 행진을 이끄는 [[레닌]]의 초상이 선명하게 그림 속에 들어가 있었고 이 초상을 제거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리베라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이 벽화는 파괴되었다. 1933년 [[12월]] 멕시코로 돌아온 리베라는 [[좌파]]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보수파]]와 기업주들로부터는 경멸을 샀다. [[1940년대]]에도 여전히 멕시코를 사랑했으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그려냈고 [[1957년]] [[11월 14일]] [[멕시코시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화려한 여성편력 == ||<bgcolor=#ffffff><table width=650><table bordercolor=#000000><table align=center><width=50%> [[파일:디에고 안젤리나.jpg|width=100%]] ||<width=50%><bgcolor=#ffffff> [[파일:디에고 과달루페.jpg|width=100%]] || || '''첫 번째 아내, 안젤리나 벨로프''' || '''두 번째 아내, 과달루페 마린''' || ||<bgcolor=#ffffff> [[파일:디에고와 프리다 실물.jpg|width=100%]] ||<bgcolor=#ffffff> [[파일:디에고 엠마.jpg|width=100%]] || || '''세 번째 아내, 프리다 칼로''' || '''마지막 아내, 에마 우르타도''' || 디에고 리베라는 자신의 예술적인 창조성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관념을 가졌다면 4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을 하지 않았겠지...-- 덕분에 여러명의 아내를 두게 되었는데... 그의 첫 번째 아내로 유명한 안젤리나 벨로프는 러시아 출신의 멕시코 화가다. 리베라하고는 1909년 말에 만나 1911년에 결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의 관계는 꽤 낭만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폐합병증으로 2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거기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않아서 벨로프가 리베라의 그림 활동을 위해 나가서 일을 하는 등의 여러 희생을 했다. 그러나 리베라는 그녀에게 이미 마음이 떠나버렸고 --심지어 벨로프와 결혼 중에 화가 마리아 보로비에프 스테벨스카와 바람을 피웠다!-- 1921년 이혼을 했다. 참고로 벨로프는 리베라의 영향을 받아 작품이 어두워졌고 이혼한 후 다시 재혼하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인 과달루페 마린은 멕시코의 [[모델]]이자 [[소설가]]다. 리베라의 그림 모델이 되면서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고 1922년 결혼을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리베라를 보고 1928년 이혼하고 바로 시인 호르헤 쿠에스타라는 사람과 결혼했으나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1933년 이혼했다. 세 번째 아내는 세상 사람들 다 아는 [[프리다 칼로]]다. 자세한 내용은 [[프리다 칼로|해당 문서]] 참조 바람. 1954년 프리다 칼로 사망 후[* 참고로 프리다 칼로가 사망하자 리베라는 "프리다에 대한 사랑이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말을 했는데 바로 다음해 1955년에 엠마 우르타도와 재혼한 것을 보면... 음...] 1955년 마지막 부인인 자신의 에이전트이자 출판 편집자 에마 우르타도와 바로 결혼을 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하지만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 리베라는 1957년 사망했고 에마 우르타도는 리베라와 2년 남짓이라는 결혼 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이 인간은 한순간에 불타는 사랑만을 쫓아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고 보면 편하다. 그리고 결혼한 와중에 아무렇지 않게 바람을 피우고 혼외자식을 만든 것을 보면 죄의식이나 도덕적 관념이 매우 형편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연인들은 그의 작품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영향을 준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또한 배우자들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녀는 벨로프와의 사이에서 2살에 요절한 아들이 있었고, 벨로프와 결혼 중에 사귄 마리아 보로비에프 스테벨스카와 낳은 딸인 [[무용가]]이자 [[배우]]인 마리카, 과달루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이자 [[건축가]]로 유명한 루스를 두었다. 또한 칼로의 모델이기도 했던 칼로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는 그의 모델이기도 했는데 이를 넘어서 그녀와 [[불륜]]을 저질렀단 얘기가 있다. == 작품 == * 안젤리나 벨로프의 초상화(1909) * 우물가의 여인(1913) * 두 여인(1914) * 게릴라(1915) * 페온의 해방(1923) * 착취자들(1926) * 풍요의 대지(1926) * 난장판인 부자들의 밤(1928) * 무기고에서(1928) * 월스트리트 연회(1928) * 빈자들의 밤(1928) * 농민 지도자 사파타(1931) * 동결 자산(1931) * 캘리포니아 알레고리(1931) * 교차로에 서 있는 남자(1933) * 꽃을 나르는 사람(1935) * 멕시코 역사(1935) * 작공(1936) * 멕시코인 인생의 사육제(1936) * 루페 마린 초상화(1938) * 상징적 풍경(1940) * 무어 박사의 손(1940) * 팬 아메리칸 유니티(1940) * 나타샤 겔만의 초상(1943) * 카라를 안은 누드(1944) == 기타 == * 그는 자신이 [[식인]] 행위를 했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 [[핑크레이디 클래식]]에서는 75화에 등장. 아내 [[프리다 칼로]]가 죽어가기 직전 마침 프리다 칼로 페이지에 들어온 한겨울에 의해 한 대 맞는다. [[분류:멕시코의 화가]][[분류:1886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식인]][[분류:지폐의 인물]][[분류:과나후아토 주 출신 인물]][[분류:유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