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덕수궁)]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c19c22><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683235,#683235 '''덕수궁 석조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 ||<-5><tablebordercolor=#0047a0><bgcolor=#0047a0><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장.svg|width=26]]]]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fffff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width=30%> 79호 ||<|2> ← ||<width=30%> '''--80호--''' ||<|2> → ||<width=30%> --81호-- || || [[경의선]] [[장단역]] 죽음의 다리 || --'''덕수궁 석조전 동관[*A 2008년 6월 23일 지위 박탈, 사적 124호로 통합.]'''-- || --덕수궁 석조전 서관[*A]-- || }}} || ||<table width=1000>[[파일:석조전.png|width=100%]] || || 석조전 || [목차] [clearfix] == 소개 == || [youtube(FbgSEXUcU4o)] || [youtube(hfdrxoEk6Cs)] || {{{+1 德壽宮 石造殿}}} '''[[대한제국]]이 [[1897년|건립된 연도]]에 짓기 시작해서 [[대한제국]]이 [[1910년|망한 연도]]에 완공한 비운의 궁전.'''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의 서북쪽, [[덕수궁 준명당|준명당]]의 서쪽에 있는 [[덕수궁]]의 [[건물]]이다. [[근대]]에 지은 [[덕수궁]]에는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근대화한 [[대한제국]]의 위용을 보이려 지은 것이 석조전이다. 전통 궁궐에서 정전, 편전, 침전은 각각 따로 있었다. 하지만 석조전은 저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다. 이는 석조전을 [[틀:대한제국 황궁|대한제국 황궁]] 그 자체로 사용할 것을 뜻했다. == 이름 == ‘석조(石造)’의 뜻은 말 그대로 '[[암석|돌]](石)로 만들었다(造)'인데, 정식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궁궐]] [[전각]] 이름이 나름 깊은 [[철학|철학]]과 관련된 뜻을 담는 반면 석조전은 저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황궁 자체로 세운 건물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 당시에는 ‘석조궁전(石造宮殿)', '석궁(石宮)'--[[석궁|이거]] 말고--, '석조전당(石造殿堂)' 등 다양하게 불렀으며 나중에 ’석조전(石造殿)‘ 으로 굳었다.[[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71002070001|#]] 그동안 [[나무]]와 [[흙]]으로 [[건물]]을 지었던 [[한국인]]들에게 [[서양]]처럼 전체를 돌로 지었다는 것이 아마 굉장한 [[컬처쇼크|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건축]] 자재를 곧 이름으로 쓴 듯 하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석조전(石造殿)|#]][* 단, 2009년부터 진행된 복원공사 도중 적색 벽돌을 쌓은 뒤 석재로 외관을 포장하여 건축했음을 확인했다. 즉, 이름처럼 완전히 돌로만 지은 건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대식당에 가면 불투명 유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역사 == === 건립 단계 === [[대한제국]]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총세무사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이 건립을 발의했다. 처음에는 [[경희궁]]에 지으려 했으나 브라운 권유로 [[경운궁]]에 세웠다.[* [[경희궁]]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머물던 [[경운궁]]과 [[다리(건축물)|운교]]를 설치했을 정도로 가깝고, 다섯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부지가 비어있어서 그곳에 지으려고 했던 것 같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으로 환궁[* 還宮. [[궁]]으로 돌아가다.]한지 한 달 채 못지난 1897년([[건양]] 2년) 3월에 브라운이 [[통역사|통역관]]과 함께 경운궁 안 [[지형]]을 측량했다는 〈[[독립신문]]〉 [[기사]]를 보아[[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212&cid=62142&categoryId=62340|#]] 이미 그 때부터 [[양식|서양식]] [[궁전]] 건설을 기획한 듯 하다. [[공사]] 진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었다. 1897년([[건양]] 2년) ~ 1901년([[광무]] 5년)에 설계 및 기초공사를, 그리고 1903년(광무 7년) ~ 1906년(광무 10년)엔 구조공사, 마지막으로 1907년(광무 11년) ~ 1909년([[융희]] 3년)은 내부공사를 했다. 설계는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날드 하딩(J. R. Harding)이 맡았다. 하딩은 석조 건물이 낯선 [[한국인]]들에게 공사에 앞서 [[나무]]로 1/10 정도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1900년 5월 26일자 [[미국]] [[잡지]]〈아메리칸 아키텍처 앤드 빌딩 뉴스(American Architecture and Building News)〉에서 저 모형을 실었다. ||<table width=662>[[파일:석조전 모형.png|width=100%]]|| || 하딩이 제작한 모형. 가운데 계단 등을 빼고는 현재와 유사하다. || 기초공사는 1900년([[광무]] 4년)부터 시작했다. [[한국인]] 건축기사 심의석[* 沈宜錫. 1854 ~ 1924. [[탑골공원]] 팔각정, [[원구단]], 광화문 기념비전 등을 지은 도편수로 이외에도 [[배재학당]] 강당을 비롯하여 [[독립문]], [[손탁호텔]] 등의 서구식 건축 공사에도 참여했다. [[정동]] [[토박이]]였기에 [[서양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서 일찍이 [[서양]] [[건축]]에 눈 뜬 듯 하다.]이 참여한 가운데, [[일본인]] 오가와 요키치(小川 陽吉) 기사를 초빙하여 1901년에 마무리했다. 자재는 [[창의문]] 근처 돌산에서 나는 [[화강암]]을 활용했다. 1902년([[광무]] 6년)에서 1903년(광무 7년)에는 [[공사]]를 멈췄다. 오다 쇼고(小田 省吾)가 지은 《덕수궁사》에는 그 이유로 정변(政變)을 꼽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후 1903년에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이 때 [[건축]] 주도권이 브라운에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 種大郞)[* [[화폐정리사업]]을 주도한 그 사람 맞다.]에게 넘어갔고 공사도 [[일본]] 오쿠라도보쿠구미(大倉土木組)[* 타이세이 건설의 전신.]에서 맡았다. 이시이 슈헤이(石井周平)를 [[감독]]으로 하고 두 일본인 기사를 두고 공사를 진행했으며 1905년(광무 9년)부터는 [[영국인]] 헨리 윌리엄 데이비슨(Henry William Davidson)이 합류하여 함께 작업했다. 내부 공사는 2년이 걸렸다. 설계는 [[영국인]] 로벨(Lovell)이 맡았다. 배관 및 [[난방]] 시설 설치는 [[영국]]의 크리털 회사(Critall & Co.)에서 담당했고, 내부 [[장식]]과 [[가구]] 등은 역시 같은 영국의 메이플 회사(Messers Maple & Co.)에서 맡았다. === 일제강점기 === ||<table width=1000> [[파일:완공 직후 석조전.png|width=100%]] || [[파일:중화전과 완공 직후 석조전.png|width=100%]] || ||<-2> 완공 이후 모습 || 1909년([[융희]] 3년)에 드디어 완공했고 1910년 12월 1일에 공식적으로 낙성했다.[[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51201/8252539/1|#]] 그런데... 약 3달 전인 8월 29일에 '''[[경술국치|이미 나라가 망했다.]]'''(...) 그래서 처음 계획처럼 [[황궁]]으로 쓰지 못했다.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공들여 지어놓고서는 막상 완공하자 불편하다며 거주하지 않았다. 단지 귀빈 접대 및 만찬을 행하는 정도로 사용했다. 침실로 사용한 것은 이왕세자로 전락한 [[영친왕|의민태자(영친왕)]]이었다.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그는 간간히 [[조선]]에 올 때마다 여기서 지냈다. 1922년에는 아내 [[이방자]]와 [[돌잔치|돌]]도 채 안된 [[아기]]였던 [[장남]] 이진과 함께 와서 머물렀는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이진이 갑자기 [[구토]]를 하고 [[열]]이 오른 끝에 이곳에서 [[요절|세상을 떠났다.]][* 이남주([[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현손녀) 전 [[성심여자대학교]] 교수는 2014년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과 한 인터뷰에서 [[이방자]]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변한) 석조전에 [[피카소]] 그림을 보러갔는데, 이방자가 아주 담담하게 "저기 저 방에서 진이 죽었어"란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 ||<width=500> [[파일:1918년 석조전 로비에서 황실가족.png|width=100%]] ||<width=500> [[파일:석조전 앞 황실가족 및 일본관료.png|width=100%]] || || 1918년 로비에 모인 황실 가족.[br]왼쪽부터 [[영친왕|의민태자(영친왕)]], [[순종(대한제국)|순종]], [[고종(대한제국)|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 1918년 촬영한 사진. 가운데 모자 벗은 사람이 [[고종(대한제국)|고종]], 왼쪽이 [[영친왕|의민태자(영친왕)]], 오른쪽이 [[순종(대한제국)|순종]], 순종 옆이 [[의친왕]] || 1919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죽음|승하]]한 후 1933년에 [[일본 제국|일제]]가 [[덕수궁]]을 [[공원|공원화]]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사용했다.[* 그 후 [[영친왕|의민태자(영친왕)]] 부부가 [[조선]]에 올 때는 [[창덕궁 대조전]]에서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 이들이 마지막으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39년이며, 이후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것은 저로부터 24년이 지난 1963년이었다.] 그러면서 건물 내부와 앞 뜰도 많이 바꾸었다. [[미술관]]이 된 뒤 [[일본]] [[근대]] 미술품만 전시했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처음에는 [[조선]] 작품도 같이 전시하려 했으나 일본 미술가들이 "조선인의 작품을 한 공간에 같이 전시할 수 없다"며 반발했기 때문이었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nbmoh&logNo=221473850326|#]] --[[세종(뿌리깊은 나무)|ㅈㄹ하고 자빠졌네]]-- ||<table width=662>[[파일:이왕가미술관.png|width=100%]] || || 이왕가미술관으로 쓰이던 석조전 || 1936년에는 서남쪽에 새로운 이왕가미술관을 지어 1938년에 완공한 뒤 개관했다. 석조전은 근대일본미술진열관이라 했고 신관은 조선고대미술진열관이라 하여 조선 미술품을 전시했다.[[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71002070001|#]] 이것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흔히 석조전 서관으로 부른다. ||<table width=662>[[파일:덕수궁관.jpg|width=100%]]|| || 새 이왕가미술관 건물.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 광복 이후 ===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대환영 기념 잔치가 열렸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512200020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5-12-20&officeId=00020&pageNo=2&printNo=6839&publishType=00020|#]] 1946년 3월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을 그 유명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면서[[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60321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6-03-21&officeId=00020&pageNo=1&printNo=6929&publishType=00020|#]] 자연히 비공개되었다.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덕수궁]]을 일반에 다시 개방했으나 석조전은 여전히 출입할 수 없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7102500329202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7-10-25&officeId=00032&pageNo=2&printNo=327&publishType=00020|#]] ||<table width=662> [[파일:미소공동위원회 석조전.png|width=100%]] || ||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당시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에서 바라 본 석조전.[br]가운데에 [[태극기]]가 있고 왼쪽에 [[성조기]], 오른쪽에 [[소련]] [[국기]]가 걸려있다. || 이후에도 [[UN]]한국위원단에서 여러 번 회의장으로 사용했으며[[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01130032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1-13&officeId=00032&pageNo=1&printNo=393&publishType=00020|#]][[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0309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3-09&officeId=00020&pageNo=1&printNo=7533&publishType=00020|#]]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새 [[외교부|외무부]] 청사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0820003292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8-20&officeId=00032&pageNo=2&printNo=582&publishType=00020|#]] ||<table width=662> [[파일:UN한국위원단 석조전.png|width=100%]] || || 석조전에서 [[회의]]하는 [[UN]]한국위원단 ||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를 입어 1954년 5월에 [[보수]]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51900329202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5-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521&publishType=00020|#]] 1955년부터 1972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국립 박물관]]으로, 1973년부터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그리고 1987년부터 2004년까지는 궁중유물전시관이었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 2월 6일 ‘덕수궁 석조전 동관’이란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1호 ~ 제100호#s-9|등록문화재 제80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덕수궁을 이미 사적 제124호로 관리하고 있어서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자로 지정 해제했다. 2005년 궁중유물전시관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개편한 뒤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비었다.[* 2004년과 2005년 사이 텀이 있는데, 2004년 11월 '조선 왕실 역사 박물관 추진단'을 발족하여 [[박물관]] 설치를 준비했으며, 다음해인 2005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 뒤 그 해 8월에 개관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https://ko.wikipedia.org/wiki/국립고궁박물관|#]]] 이에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할 지 아니면 원래 [[황궁]]으로 [[복원]]할 지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복원하기로 하여 2009년부터 [[공사]]를 개시했다. 2014년 10월 7일에 복원 공사를 끝냈고 같은 해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大韓帝國歷史館)’으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른다. || [youtube(yuRA630Iq9k)] || || 복원을 다룬 [[YTN]] [[뉴스]] || == 구조 == 지층, 1층, 2층으로 나누었다. 정면 54.2m, 측면 31m, 높이 17.5m이며 연면적 약 4,122㎡(약 1,226평)의 규모이다. === 외부 === * 전체적으로 [[19세기]] [[서양]]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 [[로마]] [[신전]]을 생각하면 좋다. 완벽한 좌, 우 [[대칭]]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table width=662>[[파일:external/news.images.itv.com/img.jpg|width=100%]]||[[파일:external/www.oneonta.edu/parthenon.jpg|width=100%]]|| ||<-2> 신고전주의 양식. 왼쪽은 [[영국]] [[버킹엄 궁전]],[br]오른쪽은 신고전주의 건축에 많은 영감을 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이다. || * 가운데에 [[지층]]만한 높이의 [[계단]]이 있고 양 옆에는 큰 좌대를 놓았다. 계단은 맨 밑에 반쯤 땅에 묻힌 단까지 합쳐 총 18단이다. 계단 위에는 [[현관]]이 있으며 좌, 우로 [[방]]과 [[베란다]]를 둔 모습이다. ||<table width=662>[[파일:석조전 정면 계단.png|width=100%]]|| || 정면 계단 || * 모든 기둥머리는 양 끝이 아래로 회오리 치는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이다. 건물 정면과 좌, 우면 가운데 앞에 시원하게 뻗은 [[기둥]]을 세우고 위에 지붕을 받친 모습으로 [[현관]]을 구성했다. 이런 현관을 포티코(portico)라고 한다. 포티코는 기둥 숫자에 따라 더 자세하게 나뉘는데, 정면 현관처럼 기둥이 6개인 경우를 헥사스타일(Hexastyle), 측면 현관처럼 4개인 건 트리스타일(tristyle)이라 한다. 석조전 포티코에 세운 [[기둥]]은 줄지어섰다(列)하여 열주(列柱)라고 하는데, 열주는 둥글지만 좌, 우 회랑의 기둥은 네모나게 각진 모습이라 차이가 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석조전(石造殿)|#]]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이오니아 양식.png|width=100%]] || [[파일:석조전 측면 현관.png|width=100%]] || || 이오니아 양식인 기둥머리 || 동측 현관과 현관의 열주 || ||<-2> [[파일:석조전 열주.png|width=100%]] || ||<-2> 정면 현관과 현관의 열주 || * 현관 1층의 가장자리 바깥 기둥은 둥글다. 기둥의 3/4는 바깥으로 나와있지만 1/4는 벽 속에 있다. 가장자리 안쪽 기둥은 반대로 1/4가 나와있고 3/4가 벽 속에 있다. ||<table width=500> [[파일:석조전 현관 기둥.png|width=100%]] || || 현관 1층의 기둥 || * 출입문은 중앙 [[현관]]에 하나, 그리고 동, 서에 각각 1개씩 총 3개가 있다. [[문]] 위엔 삼각형 모양 박공을 조각해 두었다.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출입문.png|width=100%]] || || 출입문. 왼쪽은 서쪽, 가운데는 중앙, 오른쪽은 동쪽이다. || * 1층 베란다 [[창문]]은 위, 아래로 긴 모습이다. 창틀은 십(十)자로 만들었고 위에 삼각형 모양 박공을 단 뒤, 그 아래 양쪽에 돌 받침대를 놓았다. 창틀 상부는 아치형으로 만들고, 하부엔 두 직선 틀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작은 원형 틀을 각각 5개씩 둔 뒤 그 위에 대각선과 직선으로 무늬를 넣어 마치 [[부채]]처럼 보이게 했다. 2층 베란다 창문은 1층과 거의 같다. 그러나 창틀 위에 박공이 없고 단지 가로로 긴 석재 부재를 달았으며, 창문 윗부분이 깔끔한 사각형으로 되어있는 것이 다르다.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1층 베란다 창문.png|width=100%]] || || 1층 베란다 창문과 창의 윗부분 || || [[파일:석조전 2층 베란다 창문.png|width=100%]] || || 2층 베란다 창문과 창의 윗부분 || * 기둥머리 위로 처마도리(architrove), 프리즈(frieze), 코니스(cornice)를 얹었다. 코니스와 프리즈가 만나는 부분에 있는 네모난 부분은 마치 [[치아]]처럼 생겨서 덴틸스(dentils)라고 부른다.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처마도리 프리즈 코니스.png|width=100%]] || || 기둥머리 위부터 순서대로 처마도리, 프리즈, 코니스 순이다. || * 코니스 위, 지붕 부분은 가운데 [[현관]]과 나머지 부분이 다르다. 중앙 현관 코니스 위에는 삼각형 모양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다. 보통 페디먼트는 [[아르테미스 신전]] 항목 복원도에서 볼 수 있듯 건물 전체의 [[지붕]]으로 설치하는 게 대부분인데 석조전은 건물의 폭이 워낙 넓기 때문에 중앙 현관을 돌출 시킨 뒤 그 위에만 설치한 것이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석조전(石造殿)|#]] 페디먼트에는 [[대한제국/황사|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이화문|오얏꽃]]과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오얏꽃 잎을 장식했다.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박공.png|width=100%]] || || 페디먼트 || * 현관부를 제외한 나머지 코니스 위에는 중간 부위가 [[호리병]]처럼 생긴 [[난간]]을 두르고 일정한 간격으로 좌대를 세운 뒤 그 위에 세로로 [[무늬]]를 낸 [[항아리]] 모양 [[장식]]을 올렸다. 이런 장식을 피니얼(finial)이라고 한다. ||<table width=662>[[파일:석조전 피니얼1.png|width=100%]]|| || 피니얼[[https://www.youtube.com/watch?v=FbgSEXUcU4o|#]] || * 기반층과 [[건물]] 뒷면 [[암석|돌]] 표면을 굵고 거칠게 처리하여 재질감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이런 방식을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이라 한다.[[http://blog.daum.net/gijuzzang/3768726|#]]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러스티케이션.png|width=100%]] || || 기반부에서 보이는 러스티케이션 양식 || * 뒷면을 제외하고는 동, 서, 남쪽으로 [[베란다]]가 있다.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드나 [[아시아|아시아권]]에 지어진 [[양식|서양식]]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덥고 습한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서 [[바람]]이 잘 통하는 베란다를 건축 양식에 접목시킨 것이었다. 사실 [[한국]] 날씨는 동남아시아와 다르나 하딩이 아시아권에서 널리 쓰이던 양식대로 설계한 것이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석조전(石造殿)|#]] --다만 한국도 여름 한정으론 필요하다--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회랑.png|width=100%]] || || 베란다. 왼쪽은 1층, 오른쪽은 2층이다. || * 2층과 1층 [[기둥]] 사이마다 가운데가 [[호리병]] 형태로 된 [[난간]]을 둘렀다.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난간.png|width=100%]] || || 난간. 왼쪽이 1층, 오른쪽이 2층의 난간이다. || * 지층 주변을 기단부 기둥으로 둘러쌓았다. 지층도 베란다처럼 뒷면을 제외한 동, 서, 남쪽에 있다. 지층의 출입문은 가운데 가장자리 2칸과 동, 서 양쪽 끄트머리에 각각 1칸 씩 위치해있다. 지층의 창문은 별다른 장식이나 구조물이 없다.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지층.png|width=100%]] || || 지층 || * 1층 서쪽 가운데 칸 앞으로 [[난간]]을 둔 [[암석|석조]] [[복도|복도각]]이 있다. 이 복도각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통한다. 초창기에는 없었고, 1938년에 세운 것이다.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복도각.png|width=100%]] || || 국립현대미술관과 연결되는 복도 || === [[덕수궁 석조전/내부|내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덕수궁 석조전/내부)] == 관람 == 외부와 지층은 덕수궁 입장료만 내면 얼마든지 관람이 가능하다. 단 1, 2층의 내부를 관람하려면 [[http://www.deoksugung.go.kr/schedule/list?scheduleid=SB|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한 뒤에 해설자의 인솔 하에 단체로 들어가 보는 것만 가능하다. 현장 예약은 65세 이상 [[어르신]] 및 [[외국인]]만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http://www.deoksugung.go.kr/c/schedule/info/SB|덕수궁 홈페이지]]에 접속하거나 02-751-0753 번호(석조전 안내데스크)로 문의하면 된다. == 여담 == *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5월에 [[도둑]]이 들어 [[비단]] 10여필을 훔쳐갔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유물이었다고 하며 당시 돈으로 무려 500여 원 어치[* 현재 가치로 대략 5천만원 정도.]였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505260023920202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5-05-26&officeId=00023&pageNo=2&printNo=1720&publishType=00020|#]] 약 한 달 후 창덕궁경찰서[* 대한제국 황실(당시 이왕가)에 관한 경찰 업무를 담당하던 곳.]에서 범인을 잡았는데 알고보니 모 남작의 사위 윤형구로, [[모르핀]][* 당시에는 모루히네라고 불렀다.]에 중독되어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506250023910201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5-06-25&officeId=00023&pageNo=2&printNo=1750&publishType=00010|#]] 이후에도 공범자들을 색출하여 잡았는데 수괴는 중국인 왕림탄이며 궁전의 용품을 훔쳐서 비싸게 팔려던 목적이었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5070800239202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5-07-08&officeId=00023&pageNo=2&printNo=1763&publishType=00020|#]] * 2019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꼽은 '궁궐과 [[조선왕릉]]의 봄꽃 명소 6선' 중 하나다.[* 나머지는 [[경복궁 교태전]] 일곽, [[창경궁 옥천교]] 일대, [[덕수궁 대한문]]과 [[창덕궁 성정각]]이며 [[왕릉(무덤)|능]], [[園|원]], [[묘지|묘]] 중에서는 [[융건릉]]과 [[덕혜옹주]] [[묘지|묘]]([[홍유릉]] 구역) 산책로를 꼽았다.][[http://www.fnnews.com/news/201903120936329412|#]] * 국내에 비슷한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들이 몇 채 있다. 석조전을 [[모티브]]로 한 건물들도 있지만, [[백악관]] 등 다른 건물들을 [[오마주]]하여 지은 것도 있다. 공교롭게 대부분 [[학교]] 건물들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경희대학교/캠퍼스#s-1.1.1|경희대학교 본관]]을 비롯하여 [[경북대학교/대구캠퍼스]] 본관[[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61107/81214512/1|#]]과 [[계명대학교]] 본관 및 [[광주동신고등학교]] 본관[[https://namu.wiki/w/광주동신고등학교|#]]을 들 수 있다. ||<table width=662> [[파일:external/e4eabd2ad773ef5f72f169a6f86d26fe4c263ce4cb6d25586e135771658e5486.jpg|width=100%]] || [[파일:경북대 본관.jpg|width=100%]] || || 경희대학교 본관 || 경북대학교/대구캠퍼스 본관 || || [[파일:성서캠의본관.jpg|width=100%]] ||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800_125464711487312.jpg|width=100%]] || ||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 본관 || 광주동신고등학교 본관 || * 2020년 3월 [[SK텔레콤]]이 덕수궁관리소와 함께 덕수궁을 3차원 입체 표현한 [[어플]] 'AR(증강현실) 덕수궁'을 시범운영한다고 24일 밝혔다. 그 중 '''석조전'''과 [[덕수궁 대한문]], [[덕수궁 중화전|중화전]]과 [[덕수궁 석어당|석어당]] 등 네 곳을, AR로 재현한 [[판다]] · [[고양이]] · [[웰시코기]] 등과 인증샷을 찍을 수 있게 만든 AR 포토존으로 지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200324010014967|기사]] 참조.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AR.png|width=100%]] || || AR[[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200324010014967|#]] || * 2015년부터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마다 중앙홀에서 음악회가 열린다. 시간은 오후 7시부터 8시까지이다. 무료이지만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http://www.deoksugung.go.kr/c/schedule/info/SD|덕수궁 홈페이지]]나 02-751-0740로 전화하면 된다. ||<table width=662> [[파일:석조전 음악회.png|width=100%]] || || 2016년 석조전 음악회[[https://news.v.daum.net/v/20170117094005889|#]] || == 대중매체에서 == * [[KBS 2TV|KBS2]]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123회에 딱 한 번 등장한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이진우]] 분)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선포했다는 [[내레이션]]이 깔릴 때 [[배경]]으로 나온다. 그런데 석조전은 1910년에 준공되었기에 저 장면은 [[고증 오류]]이다. 단, [[근대]] [[국가]]로 국체(國體)가 바뀌었다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쉽게 각인시키기 위한 극적 허용으로 볼 수도 있다. ||<table width=662> [[파일:명성황후 석조전.png|width=100%]] || ||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석조전 || * [[영화]] 《[[덕혜옹주(영화)|덕혜옹주]]》 [[포스터]] [[배경]]이었다. 극에서는 딱 한 번만 나온다. 바로 [[https://namu.wiki/w/%ED%8C%8C%EC%9D%BC:1918%EB%85%84%20%EC%84%9D%EC%A1%B0%EC%A0%84%20%EB%A1%9C%EB%B9%84%EC%97%90%EC%84%9C%20%ED%99%A9%EC%8B%A4%EA%B0%80%EC%A1%B1.png|위에 나온 사진]]을 찍는 모습을 재현한 [[씬]]이다. [[포스터]]는 석조전에서 찍었지만 [[영화]]에 나온 [[장면]]은 남양주종합촬영소에 재현한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제작진들이 여러 해에 걸쳐 [[고증]]한 끝에 실제와 상당히 비슷하게 재현하여 고증작업에 도움을 준 [[문화재청]] [[학예사]]들마저 놀랐다는 후문이다.[[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600&key=20160804.22023190359|#]] ||<table width=662> [[파일:덕혜옹주 석조전 포스터.png|width=100%]] || || 석조전에서 촬영한 《[[덕혜옹주(영화)|덕혜옹주]]》 포스터 || || [[파일:덕혜옹주 석조전 로비.png|width=100%]] || || 재현한 세트장에서 촬영한 영화 속 장면 || * [[JTBC]]에서 방송한 《[[차이나는 클라스]]》 34회(강연자: [[유홍준]])[* 2017년 11월 1일 방송.]와 152회(강연자: 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2020년 4월 8일 방송.]에 등장했다. 차이가 있다면 34회에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152회에서는 건축적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것. || [youtube(W0gQp4fhk1E)] || [youtube(95_kpzqUErA)] || || 《차이나는 클라스》 34회 예고편 || 《차이나는 클라스》 152회에 나온 석조전 || [[분류:덕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