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덕수궁)] [목차] [clearfix] ||<table width=650>[[파일:돈덕전 옛 사진.png|width=100%]]|| || 돈덕전 옛 사진. 1910년 이후의 모습이다. || ||[[파일:돈덕전 현판.png|width=100%]]|| || 돈덕전 현판 || == 개요 == {{{+1 德壽宮 惇德殿}}} [[덕수궁]] 경내 [[덕수궁 석조전|석조전]] 뒤에 있었던 건물이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양식|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돈덕전도 그 중 하나이다.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1860 ~ 1921. 흔히 ‘사바틴’으로 널리 불린다. 근대기 [[서울특별시|서울]]과 [[인천광역시|인천]]의 주요 건물들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 이름 == '돈덕(惇德)' 뜻은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이다. 《[[서경|서경(書經)]]》의〈순전(舜典)〉에서 유래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돈덕전(惇德殿)|#]] [[현판]] [[글씨]]는 [[당나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모아서 만들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 역사 == ||<table width=650>[[파일:1900년대 돈덕전.png|width=100%]]|| || 1900년대 돈덕전. 멀리 보이는 뾰쪽한 탑이 돈덕전이다.[br]덕수궁 주요부 영역에서 벗어나있는 모습이다.[* 사실 이 사진은 돈덕전을 찍은 것이 아니라 [[서울 구 미국공사관|미국공사관]] 진입도로를 촬영한 것이다. 지난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한 [[독일인]] [[장교]]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의 기증사진전 도록에 실렸다.] || 처음에는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영역이 아니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대한제국]] [[정부]]의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 [[석조전]]을 짓는데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이 관장하던 해관[* 海關. [[개화기|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 오늘날의 [[세관]].]의 [[한옥]] 청사가 있었다. 그러다 1901년([[광무]] 5년) 경에 경운궁으로 편입된 듯 하다. 그러나 [[월경지|궁내 주요부 영역과는 떨어져 있었다.]][* 오다 쇼고(小田 省吾)의 《덕수궁사》를 보면 '회극문(會極門)밖 즉 현재 영국 영사관의 서쪽에 해당하며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돈덕전의 구획이 있었다.''' 회극문과 더불어 집하문(緝門)은 곧 이 작은 길을 나서 동전(同殿)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나, '''나중에 [[덕수궁 석조전|석조전]]의 건축에 즈음하여 이 작은 길은 돈덕전 부지와 더불어 본 궁역내에 들어가''' 현재 보는 바와 같은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오다 쇼고의 《덕수궁사》는 [[덕수궁]]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류]]도 많고, [[일본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후 기존의 해관 [[건물]]을 철거한 뒤 새로운 양관 [[공사]]를 시작했다. 이 새 양관이 바로 돈덕전이다.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때문이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 [[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다. 바로 그 행사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은 것이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277940175|#]][* 현재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있는 칭경비전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공사]]가 많이 더뎠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덕수궁 중명전|수옥헌]]이 불타자 한동안 멈췄다. 그러다 1902년([[광무]] 6년) 5월 경에야 다시 진행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후 언제 완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황성신문]]〉 1903년(광무 7년) 4월 6일 자 기사에 칭경예식 장소와 관련하여 돈덕전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완공했고 이름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277940175|#]] 여담으로,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치루었어야 할 칭경예식 행사를 1903년(광무 7년) 4월까지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원래 계획한 [[날]]에 열지 못했다. 이후에도 여러 이유로 미뤘다가 결국 영원히 개최하지 못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일어난 [[경운궁]] [[화재|대화재]] 때 다른 주요 건물들은 불 타 사라졌지만 돈덕전은 무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4104014_003|#]] 이후 돈덕전은 황실과 정부에서 [[덕수궁 중명전|수옥헌]]과 함께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 되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신|사절]]들을 만나고[[http://sillok.history.go.kr/id/kza_14202007_001|#]][[http://sillok.history.go.kr/id/kza_14205013_001|#]] [[잔치|연회]]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42_07A_25A_00050|#]] 한 예로, 1906년(광무 10년)에는 [[순종(대한제국)|황태자 이척(순종)]]과 [[순정효황후|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의 [[결혼|가례]] 때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의외로 [[외국]]의 [[손님|귀빈]]들이 묵는 [[숙소]]로도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1905년([[광무]] 9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등이 여기서 머물렀다. 1905년([[광무]] 9년) 11월 [[을사조약]] 이후에는 [[일본제국 경찰|일본 경관]]들이 머물며 [[경운궁]]을 감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table width=650>[[파일:순종황제 즉위 엽서.png|width=100%]]||[[파일:순종황제 즉위 엽서2.png|width=100%]]|| ||<-2> 순종황제 즉위 기념 엽서. 돈덕전의 사진이 실려있다. || 1907년([[융희]] 원년) 8월에는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24_001|#]] ||<table width=650>[[파일:1910년 이후 돈덕전.png|width=100%]]|| || 1910년 이후 돈덕전. 덕수궁 담장이 돈덕전 밖을 두르고 있다. || 1910년에 [[덕수궁 석조전|석조전]]을 완공하고 서쪽 [[담|궁장]]을 확대하면서, 돈덕전은 비로소 [[덕수궁]][* 1907년([[융희]] 원년)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한 후 [[태상황]]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사는 [[궁]]이란 뜻에서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주요부 영역으로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도 [[이왕|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생일|탄신]][[잔치|연]]을 비롯하여 여러 행사가 열렸다. 1919년 고종 [[죽음|승하]] 후 덕수궁은 비었고, 그 후 없어졌다. 정확히 사라진 때는 모른다. 다만,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100800209102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10-08&officeId=00020&pageNo=2&printNo=4606&publishType=00010|1933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최근에 돈덕전이 헐려버렸다’고 나오는 것을 보아 그해 초, 중반에 진행했던 덕수궁 공원화 작업의 일환으로 철거한 듯 하다. 이후 돈덕전 터에는 아동 유원지가 들어섰으며, [[8.15 광복]] 이후에는 덕수궁관리소와 강당을 세웠다. ||<table width=650>[[파일:돈덕전 복원 조감도.png|width=100%]]|| || 돈덕전 복원 조감도 || [[문화재청]]은 2017년까지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2018년부터 설계 및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21년 완공할 예정이다. 2020년 현재 기본 골조 공사중인데 비용 때문인지 몰라도 원래의 석조가 아닌 철골로 공사 중이다. 사실 내부 구조가 평면도 하나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훗날 더 자세한 설계도라도 발굴된다면 내부를 수정할 수 있게 이런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석조가 내부 무게를 지탱하는 방식이면 아예 건물을 다시 해체한 후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 복원 후에는 [[대한제국]] 관련 자료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https://www.yna.co.kr/view/AKR20180130073651005?input=1179m|#]] == 구조 == === 외부 === * 돈덕전 외관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만들었으며, 벽돌 쌓기 양식은 [[덕수궁 중명전|중명전]], [[덕수궁 구성헌|구성헌]]과 동일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은 중명전과 달리 붉은 벽돌은 창문 사이의 벽에만 쌓고, 주로 회색 벽돌의 비율이 높았다. === 내부 === ||<-2><table width=618>[[파일:돈덕전 평면도.png|width=100%]]|| ||<-2> 용도가 표기된 돈덕전 평면도 || || [[파일:돈덕전 1층 평면도.png|width=100%]] || [[파일:돈덕전 2층 평면도.png|width=100%]] || || 1층 평면도 || 2층 평면도 || * 돈덕전 내부의 모습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각 실의 용도가 표기된 평면도가 있다.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의 즉위식 안내 위해 작성한 것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목수현 박사가 《법규유편(法規類編)》이란 책에서 발견했다.[[https://news.joins.com/article/5061219|#]] ||<table width=618>[[파일:돈덕전 내부.png|width=100%]]|| || 돈덕전 내부 || *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돈덕전 내부의 사진이다. == 여담 == * [[순종(대한제국)|순종]]의 [[황제]] 즉위식 장소와 날짜가 각각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1907년([[융희]] 원년) 8월 27일 돈덕전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광무]] 11년)[* 1907년 8월 2일까지는 연호를 '[[광무]]'로, 8월 3일부터는 '[[융희]]'로 사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02_003|#]]] 7월 19일의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이다. 그런데 중화전에서 거행한 것은 즉위식이 아니고, [[대리청정]]을 맡은 순종에게 진하(陳賀)하는 예식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7019_003|#]] 당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 제국|일제]]에게 퇴위 압박을 받고 있어서, 절충안으로 [[양위]] 대신 [[황태자]]였던 순종에게 대리청정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저 예식을 치룬 것. 그런데 일제는 이를 슬그머니 즉위식으로 포장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를 기정 사실화 해버렸다. 그렇게 얼결에 순종은 [[황제]]에 올랐고 정식 즉위식을 같은 해 8월 27일 돈덕전에서 거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24_001|#]] === 오해 === ||<table width=650>[[파일:아관파천 오해.png|width=100%]]||[[파일:돈덕전 일본대포.png|width=100%]]|| ||<-2> 아관파천 당시 촬영한 것으로 오해받는 사진들 || 돈덕전에서 촬영한 이 사진들이 한 때 여러 [[자료]]에 [[오해|잘못 설명]]된 적이 있었다. 바로 '[[아관파천]] 당시에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을 [[대포]]를 끌고와 위협하는 [[일본군]]'의 모습으로 알려진 것. ||<table width=650>[[파일:아관파천 오해3.png|width=100%]]|| ||<-2> 위에 있는 왼쪽 사진의 사람 부분을 확대한 모습 || 촬영 시기가 [[아관파천]] 때가 아닌 이유를 살펴보자. 위에 있는 왼쪽 사진에서 사람 부분을 확대한 모습을 보면 한 [[어린이]](하늘색 원)가 있다. 바로 [[영친왕]]이다. 영친왕은 [[대한제국]] 수립 후인 1897년([[광무]] 원년) 10월에 태어났기에 [[아관파천]] 당시에는 세상에 있지도 않았다. 이것만 봐도 절대 아관파천 때 모습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영친왕이 [[시간여행]]했나요-- [[러시아]][[공사관]]이 아닌 근거도 튼튼하다. 남아있는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의 [[사진]]을 보면, 현재까지 남아있는 [[탑]]을 제외하고 전부 1층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건물]]은 2층이다. 그리고 높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대포]]를 끌고 시위할 만한 평지도 주변에 없었다. 그래서 확실히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오류]]가 밝혀진 후에는, [[아관파천]]과 관련된 설명은 많이 없어졌다. 그런데 또 한 동안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강제퇴위 당시 [[일본군]]이 [[대포]]를 끌고 무력 시위하는 모습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그럼 뭐야-- 이 사진의 정체는 훗날 초대 [[틀:역대 조선 총독|조선총독]]을 지내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육군대신이 1907([[광무]] 11)년 6월 [[고종황제]]에게 [[대포]]를 헌납하면서 사용법을 설명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영상문화사(사장 박종수)가 해제, 번역과 함께 5일 '일제가 강점한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한국병합' 관련 일본측 사진자료집인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서 드러났다.[[https://news.v.daum.net/v/20061105070114175?f=o|#]][* 기사에는 1906년으로 되어있으나, 데라우치의 [[방한]]을 언급한 당시의 [[관보]]나 [[신문]], 그리고 그가 남긴 [[일기]]를 종합해보면 1907년이 맞다. [[일본]]에서 [[대한제국]], [[조선]]을 담은 [[사진]]들의 내용을 표기할 때 이런 [[오류]]가 많이 보인다. 한 예로, 1898년 치루어진 [[흥선대원군]]의 [[장례|장례식]] [[사진]] 연도를 1899년이라고 소개했다.] 다만, 사진집을 감수한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시위 효과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로써 저 사진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왜 앞서 말한 [[루머|낭설]]들이 퍼졌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206&content_id=cp071002060001&search_left_menu=3|그 이유에 대해 추론한 포스팅]]이 있으니 한번 들어가서 읽어보자. [[분류:덕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