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대구광역시)] [[파일:Daegu_Expansion.png|width=500]] 대구의 시역 확장의 역사. 현재의 법정 경계를 기준으로 제작된 관계로, 동-리 단위 이하의 자잘한 경계변화는 생략되었다. 적색 년도는 편입 이후에 환원된 년도.[* 참고로 이 지도에는 오류가 있는데 1958년이 아닌 1957년이다. [[https://law.go.kr/LSW/lsInfoP.do?lsiSeq=2789#0000|#]] 다만 해당 사이트에서는 1957년 행정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이 공포됨과 동시에 변경이 시행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대구광역시청에서는 1957년 해당 법률의 공포로 1958년에 변경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목차] ==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 대구의 옛 이름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 이름인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다. 즉, 원래는 이 지역을 부르던 순우리말이 있었으나,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한자로 그 음을 빌려 표기하다가 가장 널리 쓰이는 '대구', '달구벌'이 정착된 것이다. 달구벌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 [[신라]]의 [[계림]] 사상에서 기원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에서 유래했다(즉, '닭의 벌판-닭벌'을 음차한 게 '달구벌')는 연구자료가 있다. ~~그래서 대구에서 [[치맥]] [[대구 치맥 페스티벌|축제]]를 여는구나~~ 그래서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수 있다. 참고로 대구시를 상징하는 새는 [[독수리]]이다.[* 그래서 [[대구 FC]]가 창단될 때 팀명을 '대구 이글스'로 정했다가 [[한화 이글스|야구팀]]이냐는 반대여론이 거세서 그냥 평범하게 대구 FC로 팀명을 바꿨다.] 다만, '달구' 또는 '달구화'와 같은 지명이 오늘날 확대된 대구광역시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현대의 대구광역시 중구와 남구 일부분에 해당한다. 대구광역시 전역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규모의 지석묘(고인돌)군과 신석기-청동기 시대 유물의 존재로 말미암아, 일찍이 군장 국가 형태의 소부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고대 삼한시대에 들어서는 [[진한]]의 소국인 [[다벌국]], 혹은 달구벌국(혹은 卓國)이었으며, 서기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244년 [[조분 이사금]] 때 달성(現 달성토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261년 [[첨해 이사금]] 때 완공되었다. 달성은 [[경주 월성]]과 비슷한 구조이며, [[해자]]를 포함했다. 달성 완공과 함께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임명했다. 이후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통일신라시기에는 [[9주 5소경]] 중 [[양주]] 소속이었다. 이 때 지금의 대구 땅에는 위화군(喟火郡, [[수성구]]), 그리고 위화군의 소속 영현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중구(대구)]]), 팔거리현(八居里縣, [[북구(대구)]] [[칠곡동]]), 다사지현(多斯只縣, [[달성군]] 하빈면), 설화현(舌火縣, 달성군 화원읍) 이 있었다.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 달구화현은 대구현(大丘縣), 팔거리현은 팔리현(八里縣),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으로 고쳤다. 보다시피 지금까지 사용하는 지명이 이 때 많이 등장했다. 다만 신라 때는 이전 지명과 경덕왕이 고친 지명이 혼용되어 달구벌, 달벌 등의 이름도 계속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현대 대구의 지명 중에도 과거 달구벌과 달벌 등에 삽입된 '달(達)'자를 넣은 곳이 있다. 대표적인 지역이 [[달서구]]와 [[달성군]].] 689년 [[신문왕]]이 이곳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기존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장보고]]군이 [[민애왕]]의 신라 관군을 상대로 20배 병력을 격파한 [[달벌대전]]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 [[고려]] == [[대구광역시]]의 지명 문서들에 가면 볼 수 있는 태조 [[왕건]]의 안습한 굴욕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 한눈에 보려면 [[대구광역시/공산 전투 관련 지명|여기로]]. 대구현 지역은 경산부(현 [[성주군]])에 속했다. 수창군을 수성군(壽城郡)으로 고쳤고 지금의 [[수성구]] 이름으로 이어진다. == [[조선]] ~ [[대한제국]] ==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한자가 [[공자]]의 [[이름]]인 [[피휘|구(丘)와 같다고 하여]]''' 개칭 떡밥이 생겨났다. [[영조]] 때는 [[http://lighton.egloos.com/2738379|반려되었으나,]] [[정조(조선)|정조]] 초기 1783년 대구(大邱)로 한자를 바꿨는데 이 역시 [[순조]] 때까지도 함께 쓰이다가 이후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는 물론 대구(大邱)로만 쓴다. 중국어권에서는 간혹 구(邱)와 구(丘)를 헷갈려 "大丘"로 쓴 사례도 있다. ~~의도치 않게 대구의 옛 이름을~~ 둘 다 뜻이 언덕인데다 현대 중국어 발음에서도 발음(qiu)과 성조(1성)가 같다. 일본어로는 그쪽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카타카나]]로 "テグ(大邱)"로 쓰는데 간혹 일반인의 경우 한자를 헷갈려서 글자꼴이 비슷한 "대저(大邸)"로 쓰는 사례도 발견된다. 대구의 [[진산]](鎭山)인 달성산의 이름은 옛 이름 '달구벌'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이 정식 행정구역 명칭으로 남아 있어 도시명의 유래를 잇고 있다. 1419년(조선 세종 원년) 대구현·수성현(수성구 일대)·해안현·하빈현(달성군 하빈면, 다사읍 일대)을 통합하여 대구군으로 승격하였다. 1466년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01년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경상감영은 역사가 참 복잡한데, 조선 초기에는 경주부에 있었다가, 태종 7년(1407년)에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우도로 나누면서, 좌도는 경주부, 우도는 상주목에서 관할하도록 했다. 그러다 여러가지 부작용 때문에 다시 경상좌/우도를 하나로 합치며 경상감영을 상주목에 두었다. 그 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분리됐다 합쳐졌다를 반복하면서 [[성주군|성주]]의 속현 팔거현(現 [[칠곡군]]), 대구도호부, 안동대도호부 등으로 이전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 대구도호부에 경상감영이 세워졌는데,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대구도호부는 아예 [[개발살]]이 나고(...) 감영은 안동대도호부로 옮겨갔다. 그러다 1601년, 안동대도호부가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대구도호부에 세워졌고 그 이후로 경상감영은 쭉 대구도호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역사 한번 참 복잡하다~~ 참고로 대구는 경상도(영남) 전체를 보았을 때 거의 정중앙에 있다.~~참고로 전국 8도중 유일하게 감영이 도호부에 위치하게 된다~~ [[파일:attachment/대구광역시/역사/daegu1896.jpg|width=500]] 구한말 대구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현재의 [[청도군]] 각북면, 각남면, 풍각면까지도 대구부 관할에 있었으나, 1906년 청도군으로 편입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23부제]]로 개편되었을 때 대구부 소재지가 되었다(대구 지역은 대구부 대구군, 현풍군). 1896년 다시 13도제로 바뀌면서는 경상북도 관찰사 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풍각면, 각남면, 각북면을 [[청도군]]으로 이관했다. 또한 현풍군의 낙동강 북부 지역을 고령군으로 이관했다. == [[일제강점기]] == 조선말까지만 해도 대구는 경상도에서 [[경주시|경주]], [[상주시|상주]], [[진주시|진주]]보다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의 부설로 인해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 수운의 교차점에 위치한 대구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반면 경부선 철도 노선에서 소외된 경주, 상주, 진주는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일제시대말 대구는 [[서울특별시|서울]], [[평양직할시|평양]], [[부산광역시|부산]]에 이은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파일:attachment/대구광역시/역사/daegu1914.jpg|width=500]] 1914년 4월 1일 실시된 [[부군면 통폐합]]으로 인한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부는 현재의 중구 일원만 '''대구부'''로 남고, 나머지 영역은 현풍군과 통합하여 '''[[달성군]]'''으로 분리되었다. 일본어로 대구는 たいきゅう(다이큐), 달성은 たつじょう(닷쇼)라 발음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달성군 성북면 남부, 달서면, 수성면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이 때, 성북면 북부([[금호강]] 이북)는 공산면에 편입되었고, 달서면에 속했던 감삼동이 성서면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해안면은 동촌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때부터 [[공산동|공산면]]과 동촌면은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 ~~다사읍과 하빈면의 월경지 선배들~~ 이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 동양의 모스크바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산주의 색이 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짙은 지역이었다.[* 같은 시기 평양은 기독교 색이 짙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다.] 1946년의 [[대구 10.1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상감영공원에 대구 10.1 사건의 흔적이 남아 있다. == [[대한민국]] (대구직할시 승격 이전) == [[파일:attachment/대구광역시/역사/daegu1945.jpg|width=500]]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해방 이후 1949년 대구부(府)에서 '''대구시'''(市)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잠깐동안 임시수도로 격상되어 정부기능이 집중된 적이 있었으나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이 대구역에 포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다시 부산에 임시수도 자리를 내주었다. [[파일:attachment/대구광역시/역사/daegu1957.jpg|width=500]] 1957년 11월 달성군 동촌면, 공산면, 성서면, 월배면, 가창면의 5개 면을 대구시에 편입하여 대구시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었다. 이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게리맨더링]]이라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128002092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1-28&officeId=00020&pageNo=3&printNo=20406&publishType=00020|한다]]. 그러나 5년 후... [[파일:attachment/대구광역시/역사/daegu1963.jpg|width=500]] 1963년 동촌면을 제외한 4개 면[* 단 파동, 서변동, 동변동, 평광동은 대구시에 잔류하였다.]을 달성군으로 복귀시켜 대구시의 영역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이 때 월배면과 성서면의 경계는 1958년과는 다소 달라졌다.[* 원래 성서면 소속이었던 송현동이 이때는 월배면으로 편입되었기 때문.] 또한 같은 해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대구)|중구]], [[동구(대구)|동구]], [[남구(대구)|남구]], [[서구(대구)|서구]], [[북구(대구)|북구]]의 5개 구가 설치되었다. 참고로 공산면은 다시 외롭게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가 ~~월경지 친구였던 동촌면은 대구시에 그대로 남아서...~~,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 때 재편입되었다. 1973년 7월 달성군 화원면 대곡리가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1975년 10월 서구 원대동 일부, 노곡동, 조야동 및 동구 신암동 일부가 북구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북구로 편입된 원대동 일부는 노원동이 되었고 신암동 일부는 대현동이 되었다. 달성군 월배면은 1979년, 성서면은 1980년에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980년 동구 남부가 [[수성구]]로 분구되었다. 동시에 남구의 남산동과 대봉동 북부가 중구에 편입되고 남구에 잔류한 대봉동은 이천동으로 개칭되었다 == 대구직할시 승격 (1981년 7월) 이후 == ||[[파일:대구직할시 휘장.jpg|width=200]]|| || 대구직할시 시절의 휘장[* 해당 휘장은 일제강점기 대구부 시절부터 사용된 휘장이다. [[https://blog.naver.com/caesar117/221360938818|참고]] 현재도 맨홀 등에서 드물게 볼수 있다.] || [[파일:attachment/대구광역시/역사/daegu1981.jpg|width=500]] 1981년 7월 대구직할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상황. 1981년 7월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달성군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및 경산군 [[안심지구|안심읍]][* 현재의 동구 안심 1~4동 및 혁신동], [[고산|고산면]][* 현재의 수성구 고산 1~3동([[시지지구]])], [[칠곡군]] [[칠곡지구|칠곡읍]][* 현 북구 칠곡지구 일원]을 편입했다. 1987년 1월에는 동구 연경동이 북구에 편입되고, 서구 본리동 일부가 남구에 편입되어 본동이 되는 등 각 구 사이에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88년 1월 1일에는 서구와 남구의 각 일부[* 서구 중 [[성서지구]], [[성당동]] 전역과 내당동 일부(현 [[두류동]]), 남구 중 [[월배지구]] 전 지역]를 분리하여 [[달서구]]를 설치했다. 1995년 '''대구[[광역시]]'''로 개편됨과 당시에 [[경상북도]] 관할이었던 [[달성군]]을 편입하여 산하 기초자치단체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 때 달성군보다 상대적으로 연담화가 잘 되어 있는 [[경산시]]를 편입하는게 더 나았을 선택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1995년에 칠곡군 동명면, 지천면 편입과 함께 경산시 편입이 거론된 적이 있다.[* 이것도 단지 카더라 수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시 내무부 개편안 문서에서 대구시역 확장안의 하나로서 포함되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달성군이 산지가 많고 지리상으로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어서 경산시를 편입했더라면 --[[경산버스#s-5|시내버스 여건]]마저-- 더욱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당시 경산시는 이미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어 도세 감소를 우려한 경상북도의 반발 때문에 경산시를 대구광역시로 편입시키기는 어려웠다는 의견이 있다. [각주] [[분류:대구광역시]][[분류:향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