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웹툰 탈의 설정, rd1=차차웅(탈))] [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2><tablealign=right><tablewidth=350><tablebordercolor=#4a2d5b><tablebgcolor=#4a2d5b> '''{{{#ffd700 [[신라/왕사|{{{#ffd700 신라 제2대 국왕}}}]][br]{{{+1 南解 次次雄[br]남해 차차웅}}}}}}''' || || '''[[시호|{{{#ffd700 시호}}}]]''' ||<colbgcolor=#fff,#2d2f34>'''남해 차차웅(南解 次次雄)''' || || '''{{{#ffd700 별호}}}''' ||남해 자충(南解 慈充)[* 자윤(慈允)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br]남해 거서간(南解 居西干) || || '''{{{#ffd700 출생[br]{{{-3 (음력)}}}}}}''' ||[[기원전]] [[50년]]? || || '''{{{#ffd700 사망[br]{{{-3 (음력)}}}}}}''' ||기원후 [[24년]] 9월 || || '''{{{#ffd700 능묘}}}''' ||사릉원(蛇陵園) || || '''{{{#ffd700 재위[br]{{{-3 (음력)}}}}}}''' ||기원후 [[4년]] 3월 ~ [[24년]] 9월 {{{-2 (20년 6개월)}}} || || '''{{{#ffd700 칭호}}}''' ||삼황(三皇)(?)[* 삼국유사 남해왕조엔 "이 왕은 [[복희|삼황 중 첫째]]라고 운한다.(此王乃三皇之第一云)" 이라고 쓰여있다. 아내인 [[운제부인]]이 농업의 신으로 여겨지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삼황 중 둘째인 [[신농]]과 유사하지만. 그리고 [[복희]]와 [[여와]]의 창세신적 면모와 남매혼 묘사를 감안하면 [[복희]]=[[박혁거세]]에 대응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 '''{{{#ffd700 성씨}}}''' ||박(朴) || || '''{{{#ffd700 휘}}}''' ||남해(南解) || || '''{{{#ffd700 부모}}}''' ||부왕 [[혁거세 거서간]], 모후 [[알영부인]] || || '''{{{#ffd700 왕후}}}''' ||[[운제부인]] || || '''{{{#ffd700 자녀}}}''' ||왕태자 [[유리 이사금|박유리]](朴儒理)[br]왕녀 [[아효부인]]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의 제2대 [[국왕]]으로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부인]]의 아들. 이름은 남해(南解)이며 [[족보]]에는 유(悠), 민해(愍解)라고 적혀 있으나 사료로서의 가치는 적다. 칭호는 [[차차웅]]인데 [[삼국유사]]에서는 아버지처럼 [[거서간]]을 붙여 남해 거서간이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왕비]]는 [[운제부인]]. 제3대 국왕 [[유리 이사금]]의 아버지이자 제4대 국왕 [[석탈해]]의 [[장인어른]]이다. == 호칭 == 차차웅이라는 [[군주]]의 호칭이 특이한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의 글을 인용하며 "차차웅은 [[무당]]을 부르는 신라의 [[방언]]"이라고 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관]]이 왕이 된 셈. 물론 [[고대]]에는 신라뿐 아니라 여러 문화권을 막론하고 왕이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주재해 무속적 성격을 지니기는 했다. 당장 [[중국]]의 [[천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 의식의 신관 역할을 맡았고 근현대까지도 이런 성격이 있어서 예를 들어 중국 옆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은 [[대한제국]] 선포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환구단]] 문서 참고. 그래도 신라의 남해 차차웅처럼 대놓고 자기가 무당이라고 이름에 붙이기까지 하는 경우는 드문데 비슷한 예로 [[일본]] [[여왕]]인 [[히미코]] 정도가 있다. 남해 차차웅뿐 아니라 왕비 운제부인도 [[농업]]의 [[여신]]으로 [[신격화]]된 기록이 있으며 여동생 [[아로공주]]는 [[시조묘]]의 제사장을 맡았다는 기록처럼 박혁거세 집안의 구성원 전체가 전통 신앙의 신관 성격이 있었다. 이를 [[샤머니즘]]적인 [[부족]]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혁거세가 기록상 [[사망]]의 형태가 미심쩍음을 보면 혼란한 국가를 [[종교]]로 수습했다는 해석이 더 타당할 것이다. 차차웅을 오늘날 [[스승]]이라는 말의 기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 쓰기도 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차차웅이 앞서 혁거세 거서간의 호칭인 거서간과 동격의 의미라고 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남해 거서간(南解 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해서 마찬가지로 둘이 비슷한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에는 삼국사기를 따라 거의 남해 차차웅으로만 쓴다. == 생애 == 서기 4년 봄에 즉위했다. 가을에는 혁거세 거서간 사망 직후의 [[국상]] 기간을 노리고 [[낙랑]]이 쳐들어와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가 결국 점령하지 못해 곧 물러났다. 서기 6년 재위 3년째 봄에 [[시조묘]], 혁거세의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삼국사기 제사지에도 있는데 남해왕 3년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여동생인 아로공주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혁거세 거서간]]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박혁거세 말년의 기록이 비록 [[반란]] 같은 사건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심쩍은 묘사가 있는데 아버지 박혁거세의 사망과 [[장례식]]을 치른 기간이 차이가 나는 사실 또한 반란설에 무게를 두는 대목이라 한다. 물론 이때 건립한 것은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종묘]]와 비슷한[* 아직 [[중국]]에서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기 때문에 흔히 아는 [[조선]] 스타일의 종묘와는 다르다. 그런 것은 [[통일신라]] 대에 가야 생긴다.] 곳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 사실 삼국사기에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오르면서 "두 분(혁거세와 알영부인)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한 시점에서 의혹 확정이다.[* 예를 들어 아들인 남해 차차웅이 아버지인 혁거세를 상대로 [[아서스 메네실|왕위를 계승받는 중이라며]] [[쿠데타]]를 일으켰을 수도 있다. 당장 후대의 [[후백제]]만 봐도 [[신검]]이 [[견훤]]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위에 올랐다. 석탈해한테 국정을 맡긴 것도 남해 차차웅이 일으킨 쿠데타의 [[논공행상]]에 석탈해의 [[지분]]을 인정했다거나 쿠데타 직후의 혼란상을 석탈해가 잘 수습해서 공로를 인정하여 국정을 맡겼을 수 있다.] 기원후 8년에 딸 [[아효부인]]을 어질다는 소문이 나있던 [[탈해 이사금|석탈해]]와 [[혼인]]시켰다. 석탈해는 기록상 신라 외부 출신으로 앞서 [[금관가야]]의 [[수로왕]]과 대결했으나 패배하고 [[계림]]으로 들어와 있었다. 기원후 10년에 남해 차차웅이 [[사위]]인 석탈해를 '대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고 한다.[* 저 2가지 일을 빼고 국왕이 할 일이 몇 가지나 남는지를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외교]]나 [[지역]] 순방 정도밖에 없고 굳이 왕호를 무당 칭호로 한 것을 보면 제사 정도는 치렀을 수도 있겠다. 사실상 남해 차차웅은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 정도로 실권이 없었다.] 석탈해를 실질적으로 [[정치]]를 하는 국왕으로 대접했다는 소리이다. 여담으로 석탈해가 맡은 대보는 신라 전체 왕사에서 세 명만 맡았으며[* 호공, 탈해, 김알지] 이는 석탈해의 출신 지역을 추리하는 데 단서가 되기도 했다. [[석탈해]] 문서 참고. 기록상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는데 4년(즉위 원년)에 낙랑군이 금성([[경상북도]] [[경주시]])을 두 겹으로 에워쌌다가 물러났다. 14년(즉위 11년)에 [[왜]]가 100여 척의 배를 타고 몰려와 해변가의 민가를 [[약탈]]하자 경주 6부의 병사들을 보내 격퇴하는 사이 이번에는 낙랑 군사들이 빈틈을 노려 다시 신라에 쳐들어왔다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왜는 그렇다 치고 낙랑이 정말로 [[한사군]]의 낙랑인지는 의문인데 여러 [[학설]]이 있다. 19년(즉위 16년)에는 [[북명]](北溟)에서 [[예맥#s-2]]왕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해 남해 차차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북명은 [[삼국시대]] 기록에서 종종 등장하는 정체 불명의 나라인데 [[원산]]만 근처의 [[동예]]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북명이 동북 [[부여]]를 가리키는 것임을 들어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있다. 초기 신라의 범위가 아무리 영향권을 크게 잡아도 부여와 접점이 있을만큼 그리 넓지는 않았다는 것. 이를 석탈해가 이끌던 [[집단]]이 통째로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것을 기록하였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 외에 박혁거세의 치세에서는 보이지 않던 [[천재지변]]의 기록이 잦은데 11년 봄과 여름에 [[가뭄]], 15년 봄과 여름에 대[[기근]], 18년 [[서라벌]]에 가뭄, 7월에 누리(蝗蟲(황충): [[메뚜기]])의 재해가 있었으며 22년 [[질병]]이 크게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으며 24년 9월에 [[누리]]의 피해가 컸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기록이 적기 때문에 적었을 수도 있다. 24년에 사망하고 왕위를 아들인 [[유리 이사금]]이 물려받았다. == 대중 매체에서 모습 == * [[MBC]] 사극 [[김수로(드라마)|김수로]]에서 [[권성덕]]이 연기했다. * [[점프(드라마)|점프]]에서 아이들을 역사 여행을 보내는 차차웅 선생님의 이름은 여기에서 따왔다. 사실 위에서 말했듯 차차웅은 스승의 가차로 추정되기에 이걸 현대 한국어로 쓰면 [[동어 반복|스승 스승님]]이 된다. == [[삼국사기]] 기록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63&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남해 차차웅 본기]]''' 一年秋七月 [[낙랑]]의 군사들이 침공했다가 물러가다 三年春一月 [[혁거세 거서간|시조]] [[신라왕릉|묘]]를 세우다 三年冬十月一日 [[일식#s-6]]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왕의 장녀를 [[석탈해|탈해]]의 처로 삼다 七年秋七月 [[석탈해|탈해]]를 대보로 임명하다 八年 [[가뭄]]이 들다 十一年 [[낙랑]]인들이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다 十三年秋七月 [[일식#s-6]]이 일어나다 十五年 [[서울(동음이의어)|서울]]이 가물다 十五年秋七月 [[창고]]를 열어 [[기근]]을 [[구제]]하다 十六年春二月 [[북명]] 사람이 [[동예|예왕]]의 [[도장]]을 바치다 十九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十九年冬十一月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다 二十年 [[금성]]이 태미로 들어가다 二十一年秋九月 왕이 [[붕어#s-2|죽다]] == 관련 서적 == * [[춘추]] * [[상서]] 이훈편 * [[정의]] * [[맹자]] 안장상 * [[사기]] * [[자치통감]]의기 하상기 * [[삼국지]] 동이전 [[분류:신라의 군주]][[분류:기원전 50년 출생]][[분류:2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