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 위홍(衛弘)을 찾는다면 정사에 기록된 이름 [[위자]] 문서를 참조. * [[신라/인물]] [include(틀:신라 추존 국왕)] ||<tablebordercolor=#4a2d5b><bgcolor=#4a2d5b> '''{{{#ffd700 시호}}}''' ||<colbgcolor=white,black>혜성대왕(惠成大王) || ||<bgcolor=#4a2d5b> '''{{{#ffd700 골품}}}''' ||진골(真骨) || ||<bgcolor=#4a2d5b> '''{{{#ffd700 관등}}}''' ||[[이찬|이찬(伊飡)]][br][[각간|각간(角干)]][br][[대각간|대각간(大角干)]] || ||<bgcolor=#4a2d5b> '''{{{#ffd700 직위}}}''' ||황룡사성전감수성탑사[*872년 황룡사찰주본기][br](黃龍寺成典監脩成塔事)[br][[상대등]][*875년 삼국사기 기록] || ||<bgcolor=#4a2d5b> '''{{{#ffd700 수직}}}''' ||수병부령평장사(守兵部令平章事)[*872년 황룡사찰주본기 기록][* 수직은 임금이 명예직으로 내려 주는 직함이다. 즉 위홍은 명예 병부령평장사 직함을 가진 것이다.] || ||<bgcolor=#4a2d5b> '''{{{#ffd700 성씨}}}''' ||김(金) || ||<bgcolor=#4a2d5b> '''{{{#ffd700 이름}}}''' ||위홍(魏洪) || ||<bgcolor=#4a2d5b> '''{{{#ffd700 아버지}}}''' ||김계명(金啓明)[* [[희강왕]]의 아들.] || ||<bgcolor=#4a2d5b> '''{{{#ffd700 어머니}}}'''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 신무왕의 딸.] || ||<bgcolor=#4a2d5b> '''{{{#ffd700 형제}}}''' ||김단의(金端儀)[* 사서에는 기록이 없고 금석문에서만 나온다.], [[경문왕]](景文王) || ||<bgcolor=#4a2d5b> '''{{{#ffd700 배우자}}}''' ||[[부호부인]](鳧好夫人), [[진성여왕]](眞聖女王) || ||<bgcolor=#4a2d5b> '''{{{#ffd700 생몰연도}}}''' ||? ~ 888년[* 형인 [[경문왕]]이 875년에 승하했을 때 나이가 30세였는데 이로 보아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많아 봤자 40대 초반이다. 이는 삼국사기 기준이고 삼국유사 기준으로는 이 이후까지 생존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다소 모호하다.] || [목차] == 개요 == [[남북국시대]] [[신라]] 후기의 [[왕족]]이자 권신이며 추존 [[국왕]].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동생이자 제49대 [[헌강왕]],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의 숙부로 크게 보면 신라 [[멸망]]에 일조한 인물. '각간 위홍'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각간]]([[이벌찬]])은 신라 17관등 중 1품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사후에는 [[대각간]]으로 추숭되었다. == 생애 == 초기의 생애는 [[역사서]]에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고 짤막하게 전해진다. 경문왕 2년(872년)에 [[이찬]](伊飡)이 되었고 같은 해에 [[황룡사]] 9층 목탑을 중수할 때 황룡사성전감수성탑사 수병부령평장사(黃龍寺成典監脩成塔事 守兵部令平章事)라는 [[벼슬]]을 받고 총책임자를 맡았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에서의 기록이며, 위홍이 경문왕의 친동생이라는 기록도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잠시 동안 [[태자|태제]](太弟)[* [[https://blog.naver.com/ddugral1/220707407902|숭복사비문의 기록]]. 다만 재상직인 [[상대등]]을 겸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태(太)가 꼭 [[왕위]] 계승자를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문맥상 가장 큰 동생을 뜻하는 듯.]로 있었다. 헌강왕 때 최고위직인 상대등 위진(魏珍)이 물러나자 후임으로 상대등에 올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3028&cid=46620&categoryId=46620|#]].]. 위홍의 [[관직]] 위치상에서 보면 헌강왕부터 진성여왕 시대까지 실질적인 권력자였다고 볼 수도 있으며 천 년 신라가 망조에 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카]] 진성여왕 치세에는 위홍의 [[아내]]인 부호부인(鳧好夫人)이 진성여왕의 [[유모]]라서 총애를 받았고 조카인 진성여왕과 [[근친상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근친상간을 벌인 시점은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이 [[사망]]한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대 사회에서 [[근친혼]]은 비교적 흔했으며 신라는 [[골품제]]의 특성상 근친혼을 장려하였다. [[김유신]] 또한 조카와 [[결혼]]하였고 [[김춘추]]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5촌 관계다. 이후 [[고려]] 초기에도 근친혼은 계속되었는데 [[천추태후]]와 [[경종(고려)|경종]]은 둘 다 [[태조(고려)|왕건]]의 손녀와 손자다. 요컨대 진성여왕과 위홍의 근친상간이 시대상을 감안하면 특이하고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이야기. 위홍이 죽고 나서는 진성여왕에 의해서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업적]]으로는 진성여왕 2년(888년) 왕이 각간 위홍(魏洪)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게 하니 책 이름을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는데 책이 남아있었으면 고대 [[한국어]] 연구에 큰 기여를 했겠지만 남아있지 않다. 연회장에서 불리는 향가의 가사가 조금씩 달라 국가 공인 '[[노래방]] 가사집'을 만들려 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1/2009121101173.html|#]] 그런데 나라가 기울어 가는데 집권자라는 자가 유행가 가사집이나 편찬하고 있을 만큼 [[여유]]가 넘쳤으니 매우 웃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이 위홍의 유일한 업적이라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시절 신라가 얼마나 답이 없는지를 방증해 준다. == 대중매체에서 == [[후삼국시대]]를 다루는 매체에서 위홍이 [[진성여왕]]과 놀아나는 장면은 후삼국시대를 여는 [[왕조]] 말기의 [[프롤로그]] 격으로 주로 등장한다. 2000년 방영한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김주영(1952)|김주영]][* 2008년 [[대왕 세종]]에서 [[이숙번]]을 연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의형이자 군왕인 [[태종(조선)]]은 궁예를 연기한 배우 [[김영철(배우)|김영철]]이 맡았다. 사실 작중에서는 숙부와 조카 관계로 나오지만 김주영과 김영철은 1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이 열연했는데 배우 [[노현희]]가 연기한 진성여왕과 불같고 오글거리는 [[로맨스]]를 연출한다. 극중에서는 그저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던 [[여인]]이 원치않게 [[옥좌]]에 올라 그에 대한 환멸로 위홍에 의존하며 향략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위홍에 대한 [[사랑]]은 순애보급이다. [[성관계]]를 맺은 끝에 숙부의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했으며 [[유부남]] 숙부와 젊은 조카 간의 사랑은 당대 기준으로 보아도 문제가 많았는지 위홍의 아내가 두 눈 뻔히 뜨고 다 지켜보면서 남편에 대한 분노보다 [[하늘]]의 벌을 받을까봐 두려움에 떨 정도. 20년만에 자신이 죽이려 했던 [[궁예(태조 왕건)|궁예]]가 살아 돌아와 눈 앞에 나타났지만 [[경주시|서라벌]] 정계의 큰 손답게 의연하게 그를 맞이한다. 궁예를 그간 계속 찾아 헤맸다는데 "맨 처음에는 죽이기 위해서였지만 2번째는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왕위를 잇게 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어이없어 하는 궁예에게 하는 다음 대사가 위홍의 [[캐릭터]] 설정을 한눈에 보여준다. > 위홍: 남아있는 손이 없느니라. 네 아버님이신 경문대왕께서 가신 이후로 네 이복형들인 헌강대왕과 정강대왕마저도 후사 없이 옥좌를 버렸느니라. 오죽했으면 나이 어린 네 누이로 왕위를 이었겠느냐. '''지금 내게는 우리 가문과 왕실밖에 없느니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너를 죽이려 했고 세인들의 욕을 얻어먹어가며 어린 임금인 조카를 취했느니라. 왕실을 잃는 것보다야 그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느니라.''' 허나... 이젠 나도 지쳤다. 더 이상 나라를 지켜줄 왕손도 없느니... 아무도 없어. '''세상의 온갖 오물은 내가 다 뒤집어쓴 채''' 우리의 가문은 서서히 시들어 가고 문은 점점 닫혀지고 있는 게야. >궁예: 그렇게 나라를 생각하신 분이 오늘날의 신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이까? >위홍: 이 나라가 어때서? 내가 없었으면 이 정도라도 버틸 줄 알았더냐? 제 딴에는 [[가문]]을 지킨다고 그랬으며 어차피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계속된 [[왕위]] 쟁탈전으로 몰락해가고 있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였는데 이에 대한 [[궁예(태조 왕건)|궁예]]의 반응은 "개소리 집어쳐! 무슨 [[왕실]]을 지킨다는거야!" 그도 그럴 것이 작중 위홍은 진성여왕 대신 [[통치]]를 해야할 위치에 있었음에도 통치를 하기는커녕 진성여왕과 놀고 먹기만 했다. 지방에서 온갖 [[반란]]들이 발생하자 [[신하]]들은 위홍에게 몰려가 대처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으나 위홍은 이를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때문에 신라는 [[수도(행정구역)|수도]] 근방에 [[도적]]떼가 날뛰는 상황에 이른다. 위홍은 궁예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고 [[회유]]해봤지만 이미 기울어가는 신라에 있을 생각도 없었고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구하고 싶었던 궁예는 당연히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다. 궁예는 그래도 숙부라고 "[[출가]]하여 [[절(불교)|절]]에 들어오라"고 마지막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그마저 거부했다. 그런데 궁예가 말했던 마지막 기회가 정말 마지막이 된 것이 얼마 뒤 위홍은 진성여왕과 성관계를 맺다가 [[복상사]]라는 심히 아스트랄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사실 복상사에 대한 [[암시]]가 있었는데 궁예가 떠난 뒤 위홍은 약간 쇠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위홍이 거부하는데도 진성여왕은 위홍과 성관계를 맺기를 요구했고 이는 결국 복상사로 이어진다. 위홍은 궁예의 인생 자체가 뒤틀리게 된 원인 중 하나였으나 궁예는 증오심보다는 경멸감과 한심함을 느끼며 대놓고 그를 조롱했을 뿐이었다. 궁예는 과거를 다 털어버리고 세상에 나가 [[백성]]들을 구원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를 미워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았기에 조롱하기만 했던 것. 물론 증오라는 감정을 안 느꼈을 뿐 용서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기에 위홍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궁예는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명복]]을 빌어주거나 하지 않았다. 나중에 독[[화살]]을 맞은 궁예가 사경을 헤멜 때 [[악몽]]에서 [[경문왕]]은 나왔지만 위홍은 일절 나오지 않는다. 한편 [[후백제]]가 세워지는데 간접적으로 기여를 했는데 복상사로 죽기 전에 부하인 [[견훤(태조 왕건)|견훤]]을 서남해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던 것. 일개 [[무명]] 군관이었던 견훤은 해적 [[능창]]과 사투를 벌인 끝에 서남해를 일거에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후백제를 [[건국]]해 [[독립]]해버린다.[* 2003년 방영한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반대로 김주영이 연기한 [[조원정]]이 [[서인석]]이 연기한 [[이의방]]의 부하로 등장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진성여왕, version=80)] [[분류:생년 미상]][[분류:888년 사망]][[분류:진골 왕족]][[분류:여왕의 남편]][[분류:신라의 추존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