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파일:kimalexandra.jpg|width=150]]||[[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260179491.png|width=140]]|| || 초상화 || 활동 당시 찍은 사진 || 김 알렉산드라(본명은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1885~1918). == 소개 == [[제정 러시아]]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한국 [[독립운동가]]이다. 2009년에 [[대한민국 훈장|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091750135&code=100203|관련기사]]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힌다. 그녀는 한국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굉장히 이른 시간대에 활동하였다. 2019년에는 다음에서 김알렉산드라의 일생을 다룬 웹툰[[http://webtoon.daum.net/webtoon/view/alexandrakim|링크]]이 연재되었고, 2020년에 완결되어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저자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 제주4·3사건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소재로 만화를 그려온 김금숙 작가이다.] == 생애 == 1885년 고려인 거주지 중 하나였던 시넬니코보에서 태어난 이후 아버지 김두수와 함께 러시아로 이민을 갔는데,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돌아가자 10살의 나이로 따라갔다가 아버지가 사망한다.[* 그녀의 아버지 김두수는 러시아관리들을 위해 철도노동자에게 여러 언어를 통역해주는 통역사일을 했었다보니 한국어와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통했는데, 이 영향으로 김알렉산드라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여러 외국어 사용에 능통했다고 알려져있다.] 이후 아버지의 러시아인 친구였던 표트르 스탄케비치라는 사람에게 입양되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한 후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슬하에 아들 3명이 있다. 여기까지라면 평범한 한인의 삶이었겠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된 그녀는 결국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이혼하게 된다. 1914년 집을 나와 우랄 산맥 일대로 이주했는데, 철도노동자(중국인 조선인)들의 밀린 임금을 받아내는 등 통역사이자 노동 협상가 역할, 노동권 재판을 승소로 이끌었다. 그러다 1916년에 한 정당에 가입하게 된다. 이 정당이 다름아닌 '''[[사회민주노동당#s-3|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이 이후의 행보도 비범하기 짝이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블라디미르 레닌]]'''과 협력 관계가 된 그녀는 극동 지역의 사회주의 확산을 위해 떠나게 된다. 먼저 독일의 밀정으로 오해받아 체포되어 있던 [[이동휘]]를 구명운동으로 석방시킨 그녀는 [[김립(1880)|김립]],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으로 1918년의 일이다. 이때의 직위는 무려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비록 짧은 시간 존속했던 임시 조직이었지만,[* 정확히는 1920년 설립되는 극동공화국의 전신이다.] 그녀는 '''한국계 최초의 외국 장관'''이다. 볼셰비키 측에서 "인터내셔널리스트"로 분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볼셰비키당 하바롭스크 시위원회 사무국원(일부 국내 기록에서는 책임비서라고도 한다.)이었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특성을 볼 때 김알렉산드라가 정말로 시위원회 사무국장, 책임비서([[서기장]])였다면 하바롭스크 시장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위협을 느낀 김알렉산드라는 6월부터 100여명의 조선인 적위대를 구성해 반일항쟁에 돌입했으며, 한인사회당 창당 단 5개월 만에 [[러시아 내전|백군]]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18년 9월 16일에 처형당하게 된다. 이때의 유언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그녀가 사형당할 때 마지막 소원이 '''"8보(步)만 걷게 해다오"''' 였다고 한다. "왜 하필 8보냐?"라고 물으니,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인민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라고 하면서 죽었다. > - 출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번역 일부 수정) 그녀의 삶을 조명한 방송 * [[https://youtu.be/jztc35qO7gg|ebs 제작 도올 김용옥 나레이션]] * [[https://youtu.be/3tM0I9DuX7g|kbs 2002년 방영]] * Kbs 역사저널 그날 212회(2019.3.10) == 평가 == 비록 30대의 나이로 일찍 사망해서 오래 활약할 기회가 없었지만, 김알렉산드라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세력 내 공산주의 계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공산주의자로 유명한 이동휘가 공산주의를 배우기도 전에 김알렉산드라는 극동인민위원회의 얼굴인 외교관이자 러시아 볼셰비키의 극동방면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이동휘가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바로 김알렉산드라에 의해 석방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사 최초의 공산주의자이기도 하고... 김알렉산드라가 사망한 뒤에 한인 공산당 세력은 둘로 분열되고, 심지어 [[자유시 참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등으로 나락에 이른다. 만약 김알렉산드라가 몇년만 더 생존했다면 독립운동사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역할과 행보가 전혀 달랐을 것이다. 한국민족대백과에 쓰인 그녀에 관한 서술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공산주의를 추구한 [[이동휘]]와는 달리, 김알렉산드라는 처음부터 볼셰비키였다(...)'라고 쓰여 있다. 물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볼셰비키 소속 공산주의 혁명가이긴 하였으나 독립운동에도 큰 족적을 남겨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인데, 한국에서 그녀가 여전히 공산주의 활동가로서 더 알려져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의 마르크스가24번지에는 김알렉산드라의 기념비가 있다. 비문은 아래와 같다.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이 일하였다. 그는 [[볼셰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롭스크]]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기도 하였다. 1918년 그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각주] [[분류:1885년 출생]][[분류:1918년 사망]][[분류:한국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한국계 러시아인]][[분류:소련/인물]][[분류:건국훈장 애국장]] [[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