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bordercolor=#4A2D5B><#4A2D5B> '''{{{#white 지위}}}''' ||||<(><white> '''공주(公主), 왕매(王妹)''' || ||||<:><#4A2D5B> '''{{{#white 골품}}}''' ||||<(><white> 진골(真骨) || ||||<:><#4A2D5B> '''{{{#white 성씨}}}''' ||||<(><white> 김(金) || ||||<:><#4A2D5B> '''{{{#white 이름}}}''' ||||<(><white> 고타소(古陀炤) || ||||<:><#4A2D5B> '''{{{#white 남편}}}''' ||||<(><white> 김품석(金品釋) || ||||<:><#4A2D5B> '''{{{#white 부왕}}}''' ||||<(><white>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 ||||<:><#4A2D5B> '''{{{#white 모후}}}''' ||||<(><white> 문명왕후(文明王后) || ||||<:><#4A2D5B> '''{{{#white 형제}}}''' ||||<(><white> [[문무왕|김법민]](金法敏), [[김인문(신라)|김인문]](金仁問), [[김문왕]](金文王)[br]김노차(金老且), [[김인태]](金仁泰), 김지경(金智鏡)[br][[김개원]](金愷元) || ||||<:><#4A2D5B> '''{{{#white 자매}}}''' ||||<(><white> [[지소부인]](智炤夫人), 요석공주(瑤石公主), [[원성왕]]의 증조할머니 || ||||<:><#4A2D5B> '''{{{#white 사망지}}}''' ||||<(><white> 대야성(大耶城) || ||||<:><#4A2D5B> '''{{{#white 생몰연도}}}''' ||||<(><white> 627년 이후(?) ~ 642년 8월 || [목차] == 개요 == [[신라]]의 인물. [[태종 무열왕]]의 [[장녀]][* [[보라궁주]]의 소생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위서]]일 가능성이 큰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는 이야기고 [[삼국사기]]에는 문희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김춘추]]의 나이를 고려하면 김춘추가 [[문명왕후]]를 맞이하기 전 아내를 맞이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애당초 보라궁주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기록이 없는 인물이다.]이자 [[문무왕]]의 여동생. [[이름]]은 김고타소(金古陀炤). 아버지가 왕이 되기 전에 [[사망]]했기에 보통 [[공주]]라고 불리지 않으나 왕의 딸이라는 의미로 '고타소 공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각종 대중매체에서는 문무왕의 누나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이 [[백제]]의 태자 [[부여융]]에게 [[모욕]]을 줄 때의 기록을 보면 분명히 '나의 여동생(我妹)'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문무왕은 김고타소의 남동생이 아니라 오빠이다. 다만 이름의 고타(古陀)는 '''크다''', 소(炤)는 [[조선]] 시대까지 흔하던 여성의 호칭인 '''[[조이#s-1]]'''[* [[콩쥐팥쥐]]의 쥐도 [[동물]] 쥐가 아니라 이거다.]로 해석되는 것을 보면 딸 중에서는 장녀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무왕이 626년생이므로 그의 여동생인 김고타소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627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대야성 전투(642년)|대야성 전투]]가 서기 642년에 벌어졌으므로 사망 당시 그녀는 15세 미만의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이로 볼 때 김고타소는 어린 나이에 [[김품석]]과 [[혼인]]했고 시집간 직후에 참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야성 전투 당시 그녀의 아버지 김춘추도 39세에 불과했으므로 당시 김고타소의 나이가 10대였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김춘추의 외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혼인하고 얼마 안 되어 죽은 게 확실해보인다.] 지금 보면 일찍 혼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먼 훗날인 20세기 초중엽까지도 [[남자]]는 15~17세, [[여자]]는 14~15세 정도되면 [[혼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보다 일찍 혼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며 20살이 되어서 혼인하지 못하면 [[노총각]]과 [[노처녀]]로 분류되던 시절이었고 여자는 25살, 남자는 30살이 넘어서서 혼인하지 못하면 [[국가]] 차원에서 혼수품을 지원하는 [[정책]]도 존재했을 정도이니 10대 후반에 혼인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었다. == 생애 == 김고타소의 남편 김품석은 요충지에 있는 [[대야성]][*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의 [[도독]]으로 부임했고 김고타소도 남편과 함께 대야성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던 중 백제의 침공으로 대야성 전투가 벌어지는데 신라군이 방어에 실패해 대야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내 김고타소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 심지어 [[성왕(백제)|성왕]]을 죽인 일에 대한 복수로 [[감옥]] 바닥에 파묻어버리는 [[고인드립]]도 당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이 [[도도]]에게 죽은 뒤 성왕의 목을 도당에 파묻어버려 몸통만 백제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그렇게 대응했던 모양.] 이 때문에 아버지인 김춘추(태종 무열왕)와 오빠 김법민(문무왕)이 백제에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기둥에 선 채로 있었으며 앞에 뭔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백제를 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고구려]], [[왜]], [[당나라]]를 차례대로 방문해 [[동맹]]을 타진하게 된다. 이후 김춘추는 이전보다 더욱 몸을 사리지 않는 행보를 이어가는데 고구려에서는 동맹 제의를 거절당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했으며 친 백제국인 왜에서도 거절당하자 김춘추는 마지막으로 당나라를 방문해 [[태종(당)|당태종]]과 [[나당동맹]]을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서는 극적인 스토리를 뽑아내기 위해 김춘추와 김법민의 개인적 복수심을 이후 무리한 고구려 [[외교]], 길게는 나당동맹 체결이나 백제 [[멸망]]전까지 스토리 전개의 동기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수도 있다 당시 신라 정계에서 김춘추 일파가 입은 [[정치]]적인 타격 때문이었다.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무래도 장인 김춘추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을텐데 김품석은 대야성 상실의 가장 큰 책임자이다. 이런 점과 김품석이 [[세속오계|임전무퇴]]를 [[귀족]]의 미덕으로 여기던 신라 사회 분위기와 정반대로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항복]]하려 했던 것은 김춘추에게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신라 정계는 김춘추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비담]], [[알천]]으로 대표되는 귀족 견제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와 [[경쟁]]하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딸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대야성 전투의 여파가 크기는 했지만 단순히 정치 인생이 끝나서 그랬다면 빨리 정신차리고 움직이지 하루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있는 건 지나친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들 부자 입장에서 고타소는 당시 기준으로도 어린 나이에 시집가자마자 남편에게 [[살해]]당한 불쌍한 신부다. 특히 당시 아직 젊어서 오빠의 면모가 컸을 문무왕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여동생 일을 두고두고 떠올리며 괴로워한 걸 보면 진짜로 [[시스콘]]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걸로 진지하게 시스콘 드립치면 곤란하다. [[역사]]에서 젊은 나이에 살해당한 형제자매에 대한 한이 평생 동안 맺힌 사람들은 많다. [[조위]]의 [[황제]]인 [[조비]]가 그 예. 그나마 문무왕은 침 뱉고 모욕하기는 했어도 어차피 부여융은 적국의 왕자였고 그의 아버지인 무열왕이 용서해준 것도 아니니 참작 여지라도 있지 조비는 제 아비가 용서해준 상대로, 그것도 자기 휘하를 상대로 마구 핍박을 해 죽게 만들었다는데서 문무왕보다 한 술 더 떴다...] 그녀의 [[시신]]은 나중에 [[김유신]]이 647년 [[옥문곡 전투]]에서 붙잡은 8명의 백제 [[장군]]과 교환해 수습했는데 이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이 660년 함락되고 백제의 태자 부여융도 사로잡히자 당시 [[태자]]였던 김법민(문무왕)은 부여융의 무릎을 꿇리고 침을 뱉은 뒤 "네 [[의자왕|아비]]는 나의 여동생 김고타소를 참혹하게 죽이고 옥 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이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였다."라고 말했다. 보통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옛날 [[역사서]]들의 기록들은 대부분 정제되고 건조하거나 완곡한 표현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은데 문무왕이 부여융을 모욕줄 때의 발언과 행동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발언은 신라가 백제의 증오감과 복수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으로 꼽힌다.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문무왕|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의자왕|너의 아비]]가 '''나의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날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 기사 == 미디어 == 대체로 남편 [[김품석]]이 막장에 백제군에 잡힌 후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정반대로 의연한 인물로 묘사된다. 애초에 대야성이 함락된 원인이 김품석에게 있고, [[김춘추]]가 아끼던 딸이라던 것 외에는 특별한 일화를 남긴 것도 아니라 나쁘게 묘사할 이유도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연개소문(드라마)]] === [[최설화]]가 연기했다. === [[대왕의 꿈]] === [[박그리나]][* [[근초고왕(드라마)]]에서 [[부여화]]의 [[시녀]]인 단단이 역을 맡았던 배우다.]가 연기했다. [[아역]]은 [[정다빈(2000)|정다빈]]. 어렸을 때 중증 [[시스콘]] 기질을 보였던 [[김법민]]([[문무왕]])만큼이나 중증 [[브라콘]][* [[김법민]]과 연화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질투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됐다.](…) 기질을 보였다. 성인역으로 바뀐 이후에는 역사 상에 나온대로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남편과 함께 [[의자왕]]의 [[창(무기)|창]]에 [[끔살]](…)[* 극 중 만삭 상태라서, 아무리 그래도 [[임산부]]를 죽이는 건 잔인하지 않나 하는 의견도 있었다.]되는 장면이 묘사되었으나 이건 [[아시발꿈]]이었고, 실제 극중에서는 [[출산]] 후 백제군 앞에서 남편을 독려하는 기개를 보이다가 백제군에게 살해됐다. [[의자왕]]의 언급에 따르면 사후 남편의 시체와 함께 목이 베여 [[조리돌림]]당한 듯하다. 김유신이 대야성을 탈환[* 실제로 대야성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야 신라에게 되돌아오기에 고증오류이다.]한 후 유해를 회수했다. [[분류:신라의 공주]] [[분류:경주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