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예루살렘 국왕]] [[분류:키프로스 국왕]] [[분류:뤼지냥 가문]] [[분류:1150년 출생]][[분류:1194년 사망]] [include(틀:역대 예루살렘 왕국 국왕)] ||||||||<table bordercolor=#FFD700><table bgcolor=#FFF,#555><table align=center><:>[[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0px-Sibyla.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Guido_di_Lusignano.jpg]]|||||| ||||||||||<:><bgcolor=#FFD700> '''{{{#005ba6 [[예루살렘 왕국]]의 제9대 공동 국왕}}}'''|||||||| ||<#FFD700> '''{{{#005ba6 즉위명}}}''' ||||<:> [[시빌라(예루살렘 왕국)|시빌]](Sibylle) ||||<:>[[기 드 뤼지냥|기]](Guy) || ||<#FFD700> '''{{{#005ba6 이름}}}''' ||||<:> [[시빌라(예루살렘 왕국)|시빌 당주]](Sibylle d'Anjou)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 ||<#FFD700> '''{{{#005ba6 출생일}}}''' ||||<:> [[1159년]]||||<:>[[1150년]] 전후 || ||<#FFD700> '''{{{#005ba6 출생지}}}''' ||||<:>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프랑스 왕국]] 뤼지냥 || ||<#FFD700> '''{{{#005ba6 사망일}}}''' ||||<:> [[1190년]] [[7월 25일]] (31세)||||<:>[[1194년]] [[7월 18일]](43~44세) || ||<#FFD700> '''{{{#005ba6 사망지}}}''' ||||<:>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 [[키프로스 왕국]] [[니코시아]]|| ||<#FFD700> '''{{{#005ba6 매장지}}}''' ||||<:>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불명 ||||<:>[[키프로스 왕국]] [[니코시아]] 템플기사 교회 || ||<#FFD700> '''{{{#005ba6 가문}}}''' ||||<:> [[앙주 가문|앙주]] (House of Anjou) ||||<:>뤼지냥 (House of Lusignan)|| ||<#FFD700> '''{{{#005ba6 부모}}}''' ||||<:> [[부친]] [[아모리 1세|아모리 당주]] [br][[모친]] 아녜스 드 쿠르트네 ||||<:> [[부친]] 위그 8세 드 뤼지냥[br][[모친]] 부르고뉴 드 랑콩 || ||<#FFD700> '''{{{#005ba6 배우자}}}''' ||||<:>굴리엘모 델 몬페라토[* 알레라미치(몬페라토) 가문의 굴리엘모(기욤). 현대 프랑스어로 기욤 드 몽페라.][br][[기 드 뤼지냥]]||||<:> [[시빌라(예루살렘 왕국)|시빌 당주]] || ||<#FFD700> '''{{{#005ba6 자녀}}}''' ||||<:>[[보두앵 5세]] [br]알리스 드 뤼지냥[br]마리 드 뤼지냥||||<:>알리스 드 뤼지냥[br]마리 드 뤼지냥 || ||<#FFD700> '''{{{#005ba6 종교}}}''' ||||||||<:> [[로마 가톨릭]] |||||||| ||<#FFD700> '''{{{#005ba6 재위기간}}}''' ||||<:>[[1186년]] 8월 말 ~ [[1190년]] [[7월 25일]] (3년 11개월) ||||<:>[[1186년]] 8월 말 ~ [[1190년]] [[7월 25일]] (3년 11개월) || [목차] == 개요 == [[십자군 전쟁]] 당시의 기사. [[프랑스어]]로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이며 [[영어]]로 Guy of Lusignan이라고 쓴다. 그 외에 [[예루살렘]]의 기(Guy of Jerusalem), [[키프로스]]의 기(Guy of Cyprus)란 칭호도 존재한다. == [[프랑스]]에서의 행적 == * 뤼지냥 가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https://m.cafe.naver.com/archedankook2015/185|링크]] 참고 [[프랑스]] 푸아투 출신으로, 뤼지냥 가문은 푸아투 지역의 영주이면서 동시에 아키텐 [[공작(작위)|공작]]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었다. 1168년, 기와 그 형제들이 당시 근처를 약탈하고 귀환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대귀족이자 최강의 세력을 가졌던 [[솔즈베리]] 백작 패트릭을 살해하고 그 일행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인물 중에는 훗날 잉글랜드의 대귀족이 되는 [[윌리엄 마셜]]도 있었다. 게다가 패트릭은 다름아닌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헨리 2세]]의 부인이자 [[리처드 1세]], [[존 왕]]의 어머니.]를 호위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대형사고. 더 상세히 사고를 설명하자면, 아키텐에 종속된 사람이 아키텐을 소유한 사람[* 아키텐은 엘레오노르의 소유였고, 그녀와 결혼한 헨리 2세 및 둘 사이의 아들이 공작위를 세습받았다.]의 친구이자 호위하는 사람을 죽이고, 그의 물건을 털어갔다. 명백한 반역인 셈. 쉬운 말로 명색이 귀족이지 그냥 동네 깡패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이나 서양 귀족들이 고상한 척 거들먹거리고 있지 이 시절에는 그냥 개싸움 잘하는 놈이 왕의 눈에 들면 작위 받던 시절이다.] 당시 아키텐 공작을 대행하고 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이 보고를 듣고는 진노하였으며, 당장 기와 그 형제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프랑스에서 쫓겨난 기는 그의 형 아모리가 있던 [[예루살렘 왕국]]으로 건너갔다. 이를 계기로 기는 예루살렘 왕가의 가신 자격으로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행적 == 이 시기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은 [[보두앵 4세]]였는데, 공교롭게도 나병 환자였던 까닭에 후계자를 놓고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가 망명한 시점에는 [[트리폴리 백작국|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티베리아스(Tiberias) 또한 그의 영지였기 때문에(정확히는 그의 아내인 갈릴리 공작부인 에시바의 영지였다) '티베리아스의 레몽'이라고도 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티베리아스는 영어 발음인 '타이베리어스'로 불린다. 레몽 3세의 배역은 [[제러미 아이언스]].]와 [[에데사 백작국|에데사]] 백작 보에몽이 연대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보두앵 4세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1180년 기를 누이 [[시빌라]]와 혼인시켜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으로 서임하였다. 그리고 1182년에는 섭정으로 임명하여 왕국의 전권을 맡겼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 하지만 기는 [[르노 드 샤티용]](또는 샤티용의 레이날드)과 동맹을 맺고 이슬람 상단을 공격하여 [[살라흐 앗 딘]]과 맺은 휴전조약을 파기해 버렸는데, 이는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을 봐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결국 분노한 [[보두앵 4세]]는 시빌라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보두앵 5세]]를 공동왕으로 세우고, 기의 섭정직을 박탈하였다. 더 나아가 시빌라와 기의 혼인도 파기하려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1185년 나병으로 숨을 거두면서 파혼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게다가 [[보두앵 5세]]가 이듬해 사망하면서 그 뒤를 이어 시빌라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이벨린의 발리앙|발리앙]]의 양녀인 이자벨[* 시빌라의 이복동생인데, 이자벨의 어머니가 발리앙과 재혼을 했다.]과 시빌라의 다툼으로 왕위 계승 문제가 심각했다. 이사벨의 남편 옹프루아가 기 드 뤼지냥을 지지하자 발리앙-레몽 세력은 시빌라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대신 기와의 파혼을 조건으로 내걸며 타협을 시도했다. 시빌라는 이를 받아들여 순조롭게 여왕에 즉위하였으나, 여왕에 오르자마자 기를 다시 남편으로 지목하면서[* [[시오노 나나미]]조차 [[십자군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시빌라는 기 드 뤼지냥의 얼굴에 반해 있었지만 기 드 뤼지냥에게 잘생긴 얼굴 빼고는 아무런 장점이라고는 없었다"고 깠다.] 기 드 뤼지냥은 예루살렘의 왕이 될 수 있었다. == [[하틴 전투]]에서의 패배(1187) == 하지만 왕위에 오른 기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 본인 스스로 일으킨 [[살라흐 앗 딘]]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살라흐 앗 딘과 중재를 위해 노력하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를 협박[* 레몽이 독단적으로 살라딘과 협정을 맺고 자신의 영지를 통행하게 해줬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성요한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이 살라딘의 대군에 학살당한 것. 이 후 교황과 주교들에게 '''"이 놈이 이교도들하고 공존을 주장하네요. 아무래도 파문시켜야 할 듯"'''이라는 서신을 날렸다.]하여 자신과 협력하게 만들고[*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작중 [[하틴 전투]] 직전에 열린 회의에서 당장 이교도들을 치러 나서자는 기와 다른 기사들에게 [[이벨린의 발리앙|발리앙]]이 지금 전쟁하면 안 된다고 반대하며 말린다. 이 때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즉 티베리아스는 '''내 기사단은 이번 전투에서 빠지겠다'''고 하며 막사를 나가 버린다. 기 드 뤼지냥은 "그럼 전공은 모두 내 차지로군"이라면서 비웃지만...] 동맹인 르노 드 샤티용과 함께 [[살라흐 앗 딘]]에 맞섰다. 그러나 [[하틴 전투]]에서 레몽 3세의 말을 안듣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대차게 말아먹고 포로로 잡혔으며 [[다마스쿠스]]로 압송되었다. 르노는 살라딘이 친히 참수했으나,[* 왜냐면 이 인간은 이슬람 세력에게 당한 일 때문에 [[무슬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기에 악명이 높았고, 나중에는 '''살라딘의 여동생'''까지 살해했다. 안 죽이는게 이상하다.] 기는 목숨만은 건지고 투옥되었다. 그 사이 [[이벨린의 발리앙]], 몬페라토의 코라도 등 남은 기사들이 [[X]]빠지게 고생해서 왕국 전체가 공중분해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예루살렘은 어쩔 수 없이 넘겨주었지만. [[하틴 전투]]에서의 참패로 [[예루살렘 왕국]]의 영지는 사실상 [[티레]] 한 곳 밖에 남지 않게 되버린다. 하틴 전투의 소식을 들은 [[교황]] [[우르바노 3세]]가 뒷골 잡고 쓰러진 뒤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 포로 석방 후 == 1188년, 석방된 기는 시빌라와 함께 티레로 향하였으나, 티레의 영주이던 코라도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오는거냐!"'''면서 길길이 날뛰며 입성을 거부하였다. 그 때문에 티레 성 밖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제3차 십자군 원정]]대가 오자 그들과 함께 합류하여 [[아크레]] 공성전에 참여하였다. 바로 이 아크레 공격이 그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때마침 하틴 전투의 참극을 전해들은 유럽의 동지들이 속속 십자군 수하의 몇 안 남은 항구 도시들로 들어오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 멋모르는 유럽 친구들이 부하에게 무시당하며 아크레 앞에서 얼쩡이는 기의 군대를 보고 '''"예루살렘의 왕이 적은 병력으로 대적과 맞서 싸우는데 부하란 놈은 성에서 벌벌 떨고 있다."'''고 생각해서 모두 거기로 가 합류하는 바람에 정작 코라도는 개털이 되고, 기는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 그런 것도 있지만, 당시 아크레를 점령했던 [[살라흐 앗 딘]]은 아크레의 요새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해버렸기 때문에 기 드 뤼지냥이 아크레를 접수하자 제3차 십자군에게는 그야말로 '''최적의 집결지'''가 굴러들어온 셈이 되었다. 1190년 아크레 공성전 와중에 시빌라와 그의 두 딸 알리스, 마리가 모두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예루살렘 왕국의 제후들은 시빌라가 죽었으니 기는 더 이상 예루살렘의 왕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이사벨을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이사벨의 남편은 몬페라토의 코라도였고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이게 마음에 안들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기를 지지하면서 대립 구도를 형성해주었기에 한동안 왕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운 하나는 기똥차네~~ 하지만 3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되고 리처드 1세가 본국으로 귀국하자, 기는 지지 기반을 잃었고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이사벨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처드 1세]]가 오면서 점령하였던 [[키프로스]]를 기에게 선물해주었기 때문에 기는 키프로스의 영주가 되었으며, 덕분에 1192년 키프로스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기록되었다. --어째서인지 리처드 1세한테 쫓겨나서 레반트에 왔는데 리처드 1세에게 받은 게 많은 것 같다-- 그 후 열심히 해적질(성전)을 했다. 기는 1194년에 사망했지만 후계자를 두지 못했던 까닭에 형 [[애므리 드 뤼지냥]]이 그 뒤를 이었다. 1474년 자크 3세 때까지 키프로스의 왕위를 애므리의 후손이 계승했다. [* 여담으로 1489년 자크 3세의 모후이자 키프로스의 마지막 군주인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력으로 왕국을 해체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가 된 키프로스는 1571년에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다.] == 기타 == [[파일:external/vignette3.wikia.nocookie.net/Guy.jpg]]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헝가리계 뉴질랜드 배우인 마르톤 초카시가 연기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켈레보른 역으로 주인공 벨리앙 역을 맡은 올란도 브룸과 함께 출연한 바가 있다.] 상당히 찌질하면서도 매우 호전적이고 광신적이고 계급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이벨린의 발리앙의 안티 테제라 하겠다. 실제 인물 역시 찌질한 편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르노 드 샤티용]]과 공모하고 이슬람과의 전쟁에 미쳐 있는 인물로 나온다.[* 딱히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으나 사실 결단력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뭔가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르노 드 샤티용 등 강경파 세력에 휩쓸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 가깝다. 르노 드 샤티용이 [[캐러밴]]을 습격할 때도 기는 상단이 무장하고 있다며 공격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지만, 르노가 어차피 싸우러 온 건데 그럼 더 잘되지 않았냐고 하며 공격을 개시하자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기가 현실 감각과 외교 능력이 부재한 나머지 왕국을 말아먹은 것을 보면 영화에서 이렇게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 뒤로 살라딘에게 받는 대접이 무척 박하다. 하긴 그 놈의 샤티용과 한 패이고, 간접적으로 자기 여동생까지 죽게 한 놈이니. 예루살렘 공성전 직전에 (휘하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속옷에 바보모자만 입히고는 당나귀에 거꾸로 태워서 이를 예루살렘 방어군이 볼 수 있게 전시되는 굴욕을 당한다. 그리고 압권으로 예루살렘 공성전을 끝내는 협상에서 살라딘이 “기독교 백성, 병사 그리고 왕비도 모두 기독교 영역으로 갈 수 있게 해주겠네. '''아, 댁들 왕도 데려가고 싶다면 데려가게나.'''”라고 무슨 반쯤 잊은 짐짝 취급한다. 하긴 작중에서나 현실에서나 예루살렘 왕국 귀족들이 기에게 이를 가는 것을 보면 딱히 예루살렘 측에서 되돌려받고 싶어하는 인물은 아니다. 살라딘이 그를 포로로 잡은 뒤 비교하면서 말한 말대로 선왕이자 처남인 보두앵 4세와 극중 행적이 아주 비교된다.[* 역사적으로 적어도 이 위키의 평가는 보두앵 4세를 [[성군]]으로, 기 드 뤼지냥을 [[암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마디로 극중 인물의 바탕이 된 실제 군주의 평가에서도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튼 왕이 된 후 보두앵 4세와 똑같은 대사를 두 번 말하는데, 그 느낌이 다소 다른 게 포인트다. 군을 소집하라(Assemble the army.)와 내가 예루살렘이다(I am Jerusalem.)라는 두 대사인데, 같은 키워드의 대사임에도 상황과 인물이 다르기에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특히 똑같이 적의 왕이지만[* 다만 보두앵 4세는 본인이 극중에서 언급하기도 한 살라딘의 안위를 위협한 몽기사르 전투의 지도자였으나, 기는 하틴 전투의 패배로 결과적으로는 살라딘에게 이익을 가져다준 편이므로 같은 적의 왕이라고 해도 다소 격이 다르다.]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살라딘의 존중을 받는 보두앵 4세와는 달리[* 케락에서 군사를 데리고 한 회담 시 살라딘은 보두앵 4세에게 자기 의사를 보내주려 했고, 예루살렘을 얻은 뒤에도 그가 묻힌 십자가가 그려진 무덤자리를 밟지 않고 지나간다.] 포로로 잡혔을 때 그가 받은 상기의 대우를 보아도 충분히 비교된다. 이런 상기의 차이를 본다면 보두앵 4세 사후 예루살렘의 운명이 이렇게 극도의 차이를 가진 일이 되어버린 일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