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1 禁軍}}} 일반적으로 동양권 국가에서 정부와 왕을 지키는 [[친위대]], [[근위대]]를 일컫는 말. [[한국]]에서는 고려, 조선 때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던 군대를 금군이라 불렀다. == 국가 == === 백제 === [[백제]]에서는 직접적으로 금군이라는 호칭은 등장하지 않지만 최고위직인 6좌평 중 국왕의 경호를 맡은 위사좌평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금군에 해당하는 근위대가 존재하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사좌평 중 [[동성왕]] 대에 오히려 왕을 시해한 [[백가]]가 유명하다. === 신라 === [[신라]]의 금군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874년의 이찬 근종(近宗)의 반역을 토벌하는 기사에서 언급되지만, 다른 기록은 없다. 9서당 등 신라후기 시절, 중앙군을 이루는 근위대는 존재했을 것이고 이들에 대한 별칭으로 중국식 용어인 금군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발해 === [[발해]]의 군제는 10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 근위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각 위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위가 그 역할을 맡았는지는 알 수 없다. === 고려 === 내군(內軍), 시위군(侍衛軍)이라 불렸다. 고려초기 시절, 궁궐과 도성의 경비, 왕의 경호를 맡았다. 중앙군의 2군 6위와는 다른 부대이다.[* 금군을 오늘날 청와대 경호실이라 한다면 2군 6위는 [[수도방위사령부]]라 할 수 있다.] === 조선 === 1392년, [[이성계]]는 자신의 사병들을 기반으로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를 설치하게 한다. 이후 의흥친군위는 기존 고려의 중앙군이었던 2군 6위와 합쳐져 10위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의흥친군위[* 의흥친군좌위와 의흥친군우위로 구성]와 나머지 8위[* 응양위, 금오위,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비순위, 천우위, 감문위]의 지휘체계가 달라 비효율적이란 지적이 나오자, 1394년 [[정도전]]의 제청에 따라 10위(十衛)는 10사(十司)[* 4개의 시위사(侍衛司)와 6개의 순위사(巡衛司)]로 개편되었다. 의흥친군좌위는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의흥친군우위는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로 개편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8위의 응양위(鷹揚衛)[* [[고려]] 시대 국왕의 호위를 맡았던 2군 중 하나인 응양군(鷹揚軍)이 개편된 부대] 역시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개편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이후 [[태종(조선)|태종]] 4년인 1404년, 응양위(鷹揚衛)[* 상단의 응양위와는 이름만 같은 부대로서 1474년 내금위에 흡수된다.]가 창설되었고 1407년에는 내금위(內禁衛)가, 이어 1409년에는 내시위(內侍衛)[* 1424년 내금위에게 흡수된다.]와 겸사복(兼司僕)이 연달아 설치되면서 금군의 전력이 증강되었다. 그러나 북방 국경이 여진족의 침입으로 혼란해지자 점차 내금위, 겸사복 병력을 북방으로 파견하는 관행이 생겼고, 이에 따라 궁궐의 경비가 허술해졌다는 지적이 나오자 [[성종(조선)|성종]] 대인 1492년 우림위(雨林衛)가 새로 만들어져 3위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우림위의 창설에도 금군의 부족은 여전했는데, 이는 [[세조(조선)|세조]] 이후 대규모 군축이 진행되어 군 규모 자체가 크게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세조 시기 조선의 상비군은 무려 8만명에 달하였으나 이후 성종 대에 편찬된 [[경국대전]]을 보면 중앙군 약 1만, 지방군 약 4만(수군 포함)으로 크게 줄어든다. 설상가상으로 장부 상의 병력 중 상당수는 방군수포 제도를 통해 군포를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받아 실제로 근무하던 병사 수는 더욱 적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방군과 남도의 수군을 제외하고는 질 역시 현저히 저하되어 어쩔 수 없이 금군이 계속 국경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금군을 보충하기 위해 정로위(定虜衛)[* 한량들로 구성된 부대로, 겸사복장의 지휘를 받아 궁궐 숙위 등을 담당했다. 한량들이 금군에 가기 위해서는 정로위 근무 경험이 필수였다. [[중종(조선)|중종]]에 설치되어 [[광해군]] 대에 폐지된다.], 평로위(平虜衛)[* 조선 초 하삼도의 한량들로 구성한 부대인 호익위(虎翼衛)가 세조 대에 개편된 부대로 권문세가의 자제들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상당수가 [[갑사(역사)|갑사]]나 별시위(別侍衛)로 전출되었다.] 등이 창설되었고 중앙군인 [[오위]] 중 정예 병종인 [[갑사(역사)|갑사(甲士)]], 별시위(別侍衛) 등도 역시 궁궐 숙위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갑사(역사)|갑사]]와 별시위 역시 북방으로 파견되어 [[임진왜란]] 전까지 병력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양란 이후 [[효종(조선)|효종]] 재위 시 3위를 통합하여 내삼청(內三廳)이란 단일 군영 통제 아래 두었고, 지휘는 좌우별장 두 명이 맡았다. 이후 [[현종(조선)|현종]] 7년 금군청(禁軍廳)으로 개칭한 후 금군별장[* 좌우별장을 통합한 관직.]을 [[금위영]] 중군(中軍)이 겸하게 함으로써 금군청이 [[금위영]] 휘하에 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숙종(조선)|숙종]] 12년 [[병조]]에서 금군별장을 별도로 뽑게 한 뒤 [[금위영]]에서 독립하였으며 금군별장 아래 7명의 번장(番將)[* 내금위장 3명, 우림위장 2명, 겸사복장 2명]이 군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영조]] 재위 시 명칭이 다시 용호영(龍虎營)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군영의 최고책임자는 금군별장으로 부르게 하였다. [[정조(조선)|정조]] 즉위 후 숙위소[* 숙위대장은 [[홍국영]]이 맡았었다.], [[장용영]]이 창설되어 새로 궁궐 숙위 업무와 국왕 경호 업무를 맡자 기존 인원에서 100명 감축된 600여명의 규모를 유지하다가 정조 사후 [[순조]] 재위 시 다시 700명으로 증원되었다.[* 2만명에 달하는 [[장용영]]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금군을 제외하고도 무예청(武藝廳)[* 무예청에 소속된 호위무사들을 무예별감, 줄여서 무감이라 불렀었다.], 호위청(護衛廳)[* 인조반정 당시 동원된 사병(士兵)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부대로, 350명 전원 군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정1품의 호위대장이 있었으나 정3품의 호위별장이 사실상 지휘하였다.], 선전관청(宣傳官廳)[* 왕명 출납과 경호를 맡았던 선전관들이 속해있던 관청. 문반이 홍문관에 들어가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면 무반은 선전관이 되는 것을 명예로 여길 정도로 조선시대 무반들의 로망 중 하나였다.], 내시부(內侍府)[* 왕의 근접경호를 도맡던 내시를 시위(侍衛)내시라 한다.] 등이 왕의 근접 경호와 궁궐의 경비를 맡았다. 이후 1881년 무위영(武衛營)[*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을 통폐합해 만든 군영. 왕의 경호와 궁궐 경비를 맡았다.]으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무위영이 창설된지 6개월도 체 안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해체되었고 친군영(親軍營)으로 재편성되었다.[* 친군장위영(親軍將衛營)이 왕의 경호와 궁궐 경비를 도맡았다.] 1894년 친군영이 해체된 이후에는 [[조선군 훈련대|훈련대]]와 [[대한제국군 시위대|시위대]]가 맡다가 [[대한제국군 친위대|친위대]]에 해당 업무가 이관되었다. 이후 역사는 [[대한제국군]] 항목 참조. === 한나라 === [[삼국지]]에서는 금군의 지휘관이 [[대장군]]인 [[하진]]이었는데 [[하진]]이 [[십상시]]에 의해 사살당한 이후 지휘체계가 붕떠버렸다. 이후 [[동탁]]이 입성하자 [[가후]]가 [[동탁]]에게 진언하여 [[동탁]]의 병력 3,000명을 800명씩 3개조로 나눠 2400명으로 만들어 새벽에 몰래 내보낸 후 나머지 600명만으로 주둔하도록 한 뒤 아침에 1개조, 점심에 1개조, 저녁에 1개조를 각각 북을 울리며 낙양성에 입성하도록 했고 이 3개 조는 또다시 야밤에 몰래 성 밖으로 나간 뒤 다시 입성하는 방식을 몇날 며칠동안 반복한 끝에 [[하진]]이 지휘하던 금군들을 [[동탁]]에게 항복하게 했다. 금군은 서량에서 [[동탁]]을 도와주기 위해서 계속 [[병력]]을 보내는 줄 알고 동탁에게 항복했다. 그 금군 장수 중 한명이 [[조조]]도 무찌르고 [[손견]]도 무찌른 [[서영(삼국지)|서영]]이었다. === 송나라 === 황제의 전제 정치와 문치주의의 병폐 때문에 강간약지(중앙의 금군을 강화하고 지방군을 약화시킨다.)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 결과 ~~[[수호지]]의 단골 대사인 80만 금군~~ [[송나라]] 군대는 개국 이래 멸망할 때까지 연전 연패를 기록하였으며, 후일 북방의 [[금나라]]에게 정복당한다. 문(文)의 극단적인 우세와 무(武)의 극단적인 천시가 빚어낸 비극. == 매체 == 사극에서는 국왕 경호, 궁궐 경비 외에도 왕의 [[비밀경찰|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국산 판타지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에는 왕과 황제를 지키는 전속 경호병이자 황제의 밀명을 받아서 행동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원류는 [[유해의 폭포]]가 [[사모 페이]]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붙여준 [[갈바마리]]를 비롯한 22명의 두억시니이며, 금군들에게는 고위 관료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도 불문에 부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킹덤(드라마)]]에서 등장한다. == 같이 보기 == * [[조선군]] * [[오군영]] * [[오위]] * [[고려]] * [[고려군]] * [[당/군제]] [[분류:조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