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희궁)]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f140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경희궁 흥화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조선 왕궁의 정문)] ||<-5><tablebordercolor=#ae1932><bgcolor=#ae1932><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width=30%> 18호 ||<|2> ← ||<width=30%> '''19호''' ||<|2> → ||<width=30%> 20호 || || [[수표교]] || '''경희궁 흥화문''' || [[정각원#s-1|경희궁 숭정전]] || }}} || ||<table width=662>[[파일:Heunghwamun.jpg|width=100%]]|| [목차] == 개요 == {{{+1 慶熙宮 興化門}}} 흥화문(興化門)은 [[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18)에 세운 경덕궁(현재 [[경희궁]])의 정문이다. [[1910년]] [[일본 제국|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서울고등학교]]의 전신 중 하나이다. 공식적으로 서울고는 경성중학교 시절을 자교의 전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성중학교가 있던 경희궁 자리에 들어선 것은 오늘의 서울고등학교다. 서울고의 교지 등에서 '경희'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동 [[박문사]]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박문사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서울신라호텔]]이 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의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신라호텔에는 흥화문을 복제한 새 정문을 세웠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원래 궁궐의 동남쪽 모퉁이,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동향하여 서 있다가 [[1915년]] 도로공사로 남쪽으로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와 달리 남향으로 되었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경희궁 흥원문|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경희궁 개양문|개양문(開陽門)]], 서쪽에 [[경희궁 숭의문|숭의문(崇義門)]], 북쪽에 [[경희궁 무덕문|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 특징 ==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이다. 흥화문은 건립 당시에는 다른 궁궐의 정문과 같이 중층으로 세울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인경궁]](仁慶宮)의 정문이 층문(層門)이어서 단층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덕궁이 애초에 일시적으로 화재나 유행감염병 등을 피할 때 잠깐만 거처할 피우처(避寓處)였기 때문이다. 흥화문의 초석과 기둥은 원형이며, 가운데 기둥 열 3칸에는 문짝을 달았다. 문틀 위에는 홍살을 달았고,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었다. 천장은 가운데 칸은 연등천장, 좌우 협간은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다. 지붕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 기타 == 현판의 글씨는 조선시대 당시부터 쭉 명필로 인정받아, 밤에도 그 글씨가 빛을 발산한다하여 경희궁을 "야주개 [* 夜照峴-야조현, 밤에도 빛이 비치는 고개] 대궐" 이라고도 불렸다. 현판의 글씨는 '이신'이라는 대신이 썼다고 한다. [[분류:경희궁]][[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