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희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내정전)] [목차] || [[파일:경희궁 회상전.png|width=100%]] || [[파일:경희궁 회상전 CG.png|width=100%]] || || 회상전 [[사진]]. [[구한말|대한제국 말]]에 촬영된 것으로,[br][[잡초]]가 무성하고 행각의 벽체가 없는 등 주변이 많이 황폐화되어있다. || [[CG]]로 재현한 회상전 || == 소개 == {{{+1 慶熙宮 會祥殿}}} [[경희궁]]의 침전으로,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로 회상전 동쪽에 위치한 [[경희궁 융복전|융복전(隆福殿)]]이 있었다. [[전각]]의 정확한 [[주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편이다. [[정조(조선)|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경희궁 융복전|융복전]]이 [[경희궁]]의 정침(正寢)이며, 회상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라 적혀있고, 《궁궐지(宮闕志)》에는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 여기서는 내전의 정전을 의미한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만 보면 왕의 침전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비]]와 [[왕비]]들이 이 곳에서 [[사망|승하]]하거나 [[자녀]]를 [[출산]]했다는 [[조선왕조실록|실록]]의 [[기록]]을 볼 때, 꼭 [[임금]]만 이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를 종합적으로 볼 때, [[주인]]을 정확하게 정하지 않고 [[왕]]과 [[왕비]]가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이름은 '상서로움(祥)이 모인다(會)'는 의미이다. == 역사 ==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어졌으며 침전으로 [[기능]]을 처음 시작한 것은 1624년([[인조]] 2년)부터이다. 1693년([[숙종(조선)|숙종]] 19년)에 약간의 [[수리]]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시대|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침전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화재|불 타]]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다. 순조가 [[사망|승하]]한 이후 즉위한 [[왕]]들인 [[헌종(조선)|헌종]]과 [[철종(조선)|철종]]은 [[경희궁]]보다는 [[창덕궁]]에 오래 머물면서 회상전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1860년대]]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할 때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쓰면서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역할이 끝났고 회상전 역시 침전의 기능을 잃었다. 다만 [[운]] 좋게도 건물 자체는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 [[경희궁 흥정당|흥정당]] · 정심합 · 사현합 · [[경희궁 흥화문|흥화문]] 등과 함께 살아남았다. >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하였다. >---- >《경복궁 중건일기》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가 들어서면서 1915년 4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28년에 [[남산(서울)|남산]] 기슭에 있던 [[일식|일본식]] [[절(불교)|사찰]] 조계사(曹溪寺)[* 지금의 조계사와는 이름만 같은, 전혀 다른 [[절(불교)|절]]이다.]에 팔려 옮겨가 [[주지]] [[사무실|집무실]]이 되었다가 1936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당시 경성 중앙 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콘크리트]]로 만든 [[방공호]]를 회상전과 [[경희궁 융복전|융복전]] 자리에 만들었다. [[8.15 해방|독립]] 이후 [[2000년대]]에 방공호를 철거하고 [[복원]]하려 했지만, [[화폐|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이유]]로 그대로 냅둔 채 현재에 이른다. ||<table width=700>[[파일:external/imgnews.naver.net/l_2016081501001812600150601_99_20160814220805.jpg|width=100%]]|| || 회상전, 융복전 자리에 [[일본 제국|일제]]가 만든 [[방공호]] || == 특징 == ||<table width=700>[[파일:서궐도 내전1.png|width=100%]]|| ||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 내전 영역. 주황색 원이 융복전이고, 보라색 원이 회상전, 그리고 초록색 원이 집경당이다. || * 회상전의 옛 모습을 [[눈(신체)|눈]]으로 보려면 《서궐도안》과 《서궐영건도감의궤》(이후 편의상 의궤로 부름), 그리고 위에 첨부한 회상전의 [[사진]]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서로 묘사한 외관이 약간 다르다. 《서궐도안》에는 정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되어있지만, 《[[의궤]]》와 회상전 사진을 보면 정면이 7칸, 측면이 4칸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경희궁]] 내전 [[건물]] 대부분이 1829년(순조 29년)에 소실되고 다시 지은 것으로, 《서궐도안》은 화재 이전, 《의궤》와 사진은 그 이후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이라 중건할 때 [[건물]]의 형태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서궐도안》엔 월대가 없으나 《의궤》엔 보이고, 또 사진에는 없다. 《의궤》와 사진을 보면 정면 가운데 3칸은 [[마루|툇마루]]가 밖으로 돌출되게 하고 분합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였는데 《서궐도안》에는 돌출된 툇마루가 없고, 중앙의 1칸 만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br][br]공통적인 부분은, 1층[*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 기둥을 세운 뒤, 쇠서[* [[소]] [[혀]] 모양의 부재.]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짓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또 [[건물]] 앞면엔 [[암석|[돌]]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폭이 좁은 돌판을 얹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하였고 돌 판 가장자리엔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하였다. 또 [[전각]]에 들어갈 때 오르는 [[계단]]도 [[나무]]로 만들었는데 《의궤》엔 3개로 되어있으나 [[사진]]엔 1개만 놓여있다. 내림마루는 양성바름 한 뒤 그 위에 [[잡상]]을 올려 격식을 차렸다. * 《서궐도안》 및 《[[의궤]]》를 보면 [[지붕]]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바로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인데, 회상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왕]]과 [[왕비]]의 침전의 경우 [[왕자|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국|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집|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덕수궁|경운궁]]의 침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만화카페|이거]] 아니다--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br][br]다만 위에 있는 회상전의 [[사진]]을 보면 용마루가 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허허벌판이 된 [[경희궁]] [[터]]에 얼마 안 남은 [[건물]]들을 기존의 용도와는 다르게 사용한 것이 꽤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경희궁 숭정전|숭정전]]은 창호가 다 사라지고 장대(將臺)로 활용하였다.] 회상전도 침전이 아닌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때 용마루가 생긴 듯 하다. == 부속 건물 == === 집경당 === ||<table width=700>[[파일:경희궁 집경당 CG.png|width=100%]] || || [[CG]]로 재현한 집경당 || {{{+1 慶熙宮 集慶堂}}} 집경당은 회상전의 부속 전각이다. 회상전과는 무일합(無逸閤)이란 별실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 잡은 회상전의 서남쪽에서 동향으로 세워져 같은 마당을 사용하였다. 원래 이름은 예연당(蘂淵堂)이었다. [[숙종(조선)|숙종]]은 회상전에서 태어난 직후, [[태자|세자]] 시절 이 곳에서 머물렀으며, [[경종(조선)|경종]]이 세자이던 때 [[천연두]]를 앓았을 때도 여기서 거처했다. 경종이 [[회복]]하자 숙종은 그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경사(慶)들이 이 곳에 모인다(集)’는 뜻으로 집경당(集慶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조]]는 [[신하]]를 만나거나 [[경연]]을 하는 등 편전으로도 사용하였고 여기서 [[사망|승하]]하였다. 1829년(순조 2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년 뒤 재건했으나 [[1860년대]] 중반,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경희궁]] 철거 때 헐려 사라졌다. 《서궐도안》에 따르면 정면 4칸, 측면 3칸이었고 《[[의궤]]》에 따르면 정면 5칸, 측면 4칸이었다. 1층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에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쇠서[* [[소]] [[혀]] 모양의 부재.]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짓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한 뒤 그 위에 [[잡상]]을 올려 격식을 차렸고, 《의궤》의 묘사를 기준으로 정면 5칸 중 양 끝 가장자리는 전면 창호를 달았으나 가장자리 칸과 출입문 사이의 칸들은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고 나머지 부분은 [[벽]]으로 막았다. 출입문은 다른 침전과 달리 가운데 3칸이 아니라 1칸만 내었다. 간혹 [[고종(대한제국)|고종]]이 1892년 7월에 이 곳에서 [[외국]] [[공사]]들을 접견했단 이야기가 있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907025_002|#]] 당시 고종은 [[경복궁]]에 머물고 있었고, 경복궁에도 같은 [[이름]]의 전각이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단, 그 집경당은 ‘輯敬堂’이라 [[한자]]가 다르기에 원문의 ‘集慶堂’이 오타인 지, 아니면 따로 건물이 있었는 지 아직까진 정확하게 모른다. 확실한 것은 [[경희궁]]의 집경당은 아니다. 우선 위에 적었던 《경복궁 영건일기》의 내용에서 경희궁의 남은 [[건물]] 중 집경당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860년대에 헐린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설령 남아있었다 해도 [[상식|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허허벌판이 되어 경작지로 만들고, [[뽕나무]] [[숲]]을 일군 뒤, [[창고]]와 양잠소까지 세운 옛 [[궁]]의 [[건물]]까지 굳이 가서 [[외국]] [[공사]]를 접견할 일이 없다. == 여담 == * 1626년([[인조]] 4년)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계운궁부인 구씨]]가 이 회상전에서 [[사망]]했으며 1661년([[현종(조선)|현종]] 2년) [[숙종(조선)|숙종]]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 1674년([[현종(조선)|현종]] 15년) [[효종(조선)|효종]]의 [[왕비]](당시엔 [[왕대비]]) [[인선왕후|인선왕후 장씨]]가, 1680년(숙종 6년)엔 숙종 왕비 [[인경왕후|인경왕후 김씨]]가 이 건물에서 승하했다. 마지막으로 회상전에서 [[눈(신체)|눈]]을 감은 [[사람]]은 [[순조]]이다. * 2017년 1월, 회상전을 촬영한 [[흑백]] [[사진]]이 처음 공개되었다. 맨 위의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인데, [[대한제국]] 말기에 활동했던 [[미국인]] [[선교사]] 아서 G. 웰본(1866 ~ 1928)과 새디 웰본(1872~1925) [[부부]]의 [[손녀]]인 프리실라 웰본 에비가 2016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여 알려졌다.[[https://hankookilbo.com/News/Read/201701311550873594|#]]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교태전, version=17, paragraph=3, title2=경희궁, version2=314)] [[분류:경희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