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center><tablewidth=100%><:><#4eae47>'''[[도정궁#s-5|{{{#FAFAD2 도정궁의 역대 주인}}}]]''' || ||<width=30%><:> 13대 [[완창군|완창군 이시인]] ||<:> {{{+1 →}}} ||||<width=30%><#4eae47><:>'''{{{#FAFAD2 14대 경원군 이하전}}}''' || {{{+1 →}}} ||<width=30%><:> 15대 [[창산군|창산군 이해창]] || ---- ||<-3><tablealign=right><table width=400><tablebordercolor=#94153E><bgcolor=#94153E> {{{#gold '''조선 중종의 14대손 | 도정궁 13대 사손'''[br]{{{+1 '''경원군[br] 慶原君'''}}}}}} || ||<-2><width=30%><bgcolor=#94153E> '''[[군호|{{{#gold 군호}}}]]''' ||<(> 경원군(慶原君)[* 사후 추증.][* 군호는 [[경상북도]] [[경주시|경주군]](慶州郡)에서 유래했다.] || ||||<:><bgcolor=#94153E>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bgcolor=#94153E> '''[[이름|{{{#gold 이름}}}]]''' ||<(> 하전(夏銓) || ||||<:><bgcolor=#94153E> '''[[아명|{{{#gold 아명}}}]]''' ||<(> 인손(仁孫) || ||||<:><bgcolor=#94153E> '''[[자(이름)|{{{#gold 자}}}]]''' ||<(> 치홍(致弘) || ||||<:><bgcolor=#94153E> '''{{{#gold 생부}}}''' ||<(> [[완창군]] || ||||<:><bgcolor=#94153E> '''{{{#gold 생모}}}''' ||<(> 경주군부인 경주 김씨(慶州 金氏) || ||||<:><bgcolor=#94153E> '''{{{#gold 부인}}}''' ||<(> 달성군부인 서대혜(徐大慧) || ||||<:><bgcolor=#94153E> '''{{{#gold 자녀}}}''' ||<(> 1남[* 후술하겠지만 [[양자(가족)|양자]]이다.] || ||<|2><:><bgcolor=#94153E> '''{{{#gold 생몰[br]기간}}}''' ||<:><bgcolor=#94153E> '''[[음력|{{{#gold 음력}}}]]''' ||[[1842년]] [[2월 15일]] ~ [[1862년]] [[8월 20일]] || ||<:><bgcolor=#94153E> '''[[태양력|{{{#gold 양력}}}]]''' ||[[1842년]] [[3월 26일]] ~ [[1862년]] [[11월 18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이자 [[문신]], [[정치가]]. 본명은 이하전(李夏銓). [[도정궁]]의 제13대 사손(嗣孫)[*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란 뜻이다.]이며 제14대 주인이다. == 생애 == 1842년([[헌종(조선)|헌종]] 8년)[* 헌종은 경원군의 아저씨 뻘이다. 즉, 경원군은 [[순종(대한제국)|순종]]과 같은 [[항렬]]이다.] 2월 15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도정궁]]에서 태어났다. 생후 1년 만에 아버지 [[완창군]]이 세상을 떠나 겨우 만 1세로 도정궁 사손이 되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돈녕부의 참봉과 전부[* 敦寧府,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던 관청.]가 되었고 여러 벼슬을 거쳐 원릉령[* 元陵,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김씨]]의 능.]과 진찬소 낭관[* 進饌所. 왕실 연회인 진찬에 관한 일을 맡은 임시 관청. 낭관은 각 부처의 실무 책임을 맡은 정랑(正郎)과 좌랑(佐郎)의 통칭이다.]으로 임명받았다. 만 15세인 1857년([[철종(조선)|철종]] 8년)에는 [[경모궁]]령, 사직서령 등을 지냈으며 1858년(철종 9년)에는 뭔가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국왕 또는 관부에 사정을 호소하겠다고 하다 파직당했다가 곧 복직했다. 이후에도 종친부 전부[* 조선시대 종친부의 정5품 관직으로 정원은 음관 1원이다. 종친부 대부분의 관직이 거의 명예직이지만 전부만큼은 실권이 있었다.]와 전생서 판관[* 조선 시대에 동물의 사육을 담당하던 관청], 및 충훈부도사[* 忠勳府.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에 포상 및 작우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 현재의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격이다.]등을 거쳤다. == 세도가와의 대립 및 최후 == [[안동 김씨]]의 세도로 관직이 임명되는 것에 --딥빡-- 분개한 그는 [[철종(조선)|철종]]에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김씨의 나라입니까?"'''[* 단, 이 말 자체는 [[경평군 이호]]가 했다는 설도 있다. --물론 둘 다 안동 김씨를 고깝게 본 것은 맞다.--]라 말하며 세도가를 비판했다. 당연히 이 소식을 듣고 가만있을 [[안동 김씨]]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후 줄곧 이하전을 비난하며 이하전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누명을 씌우기도 했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1862년([[철종(조선)|철종]] 13년) 7월에 오위장 이재두 등이 무고하여 전 오위장(五衛將) 김순성과 이극선 등이 체포당했는데, 그 내용이 '''이하전을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같은 달 19일부터 23일까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김순성은 [[이항로]], 이하전의 서족(庶族)인 이돈 및 이하전의 사촌 이사규 등과 모의하여 이하전을 왕위에 올리려 했으며, 이항로의 집에서 모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2달 뒤 의금부도사 조성교가 이항로를 잡아와 심문했으나 이항로는 혐의를 부인했고, 별다른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항로는 나이가 많은데다 이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해서 풀려났다.[* 근데 이돈은 실존 인물 맞다. 당시 50대로 이하전의 10촌 형이었으나 서얼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잘못이 없다해도 역적들의 수장으로 추대받았던 이하전이 형벌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리하여 1862년([[철종(조선)|철종]] 13년) 7월 25일 [[전라도]] [[제주시|제주목]][*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으로 [[유배]]를 간 뒤, 바로 위리안치형[* 죄인을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사헌부]]와 사간원, 빈청 등에서 계속 그를 [[탄핵]]했다. 결국 같은 해 8월 20일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향년 21세. 이 사건은 이하전을 [[역모]]로 엮어 제거하려는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의 음모였다는 주장이 있다. 역모 사건 치고는 너무도 엉성하고 관련자들을 잡아다 문초해도 별 다른 게 안나와 대부분 풀려난 것, 그리고 이하전이 당시 이미 안동 김씨의 눈 밖에 났다는 등의 배경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 설에 따르면, 병약한 [[철종(조선)|철종]]의 사후를 대비하여 총명한 왕족을 제거하려는 김흥근과 [[김좌근]] 등의 책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와 대척점에 있던 또 다른 세도가인 [[풍양 조씨]] 계열은 이 사건으로 자파의 지지 세력인 이하전 일파 등이 받을 타격을 최소화 하려한 반면, 안동 김씨는 이 기회를 틈타 풍양 조씨 지지 세력을 확실히 밟아버리기 위해 사태를 확대시키려고 했다. 유능하기는 했으나, 젊은 혈기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와 맞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신중함이 부족했던 인물이라 하겠다. == 사후 == 이하전이 죽은 후 이하전은 물론, 이미 죽은 이하전의 아버지 [[완창군 이시인]] 또한 파양당해[* 완창군은 원래 이전 도정궁 사손이었던 완성군 이희의 조카였으나 완성군의 아들이 없어 양자로 갔다.] [[도정궁]] 사손 지위를 잃었다. 그 자리는 3대 사손 [[응천군(1579)|응천군 이돈]]의 동생 밀산군 이찬의 9대손 이익주[* 李益周, 1868년 이후 이재익(李載益)으로 개명.]가 [[완창군]]의 양아버지 [[완성군|완성군 이희]]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가 대신 맡았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한 후 이하전의 복권 논의가 일었고, 고종은 1872년(고종 9년) 7월 25일 [[도정궁]] 사손으로 다시 이하전을 정하면서 완전히 [[신원]]을 [[복권]]시켰다.[* 사손을 대신했던 이재익(1868년 이전 이익주)은 본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하전의 후사는 조카 뻘 먼 친척을 입양하여 잇게 했다. 자세한 것은 아래의 [[경원군(1842)#s-8|가족과 후손]] 단락 참조. [[순종(대한제국)|순종]] 즉위 후인 1908년([[융희]] 2년) 5월에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받았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덕송리 덕릉마을 내 [[덕흥대원군]]묘 권역에 있다. ||<table width=500>[[파일:400_128377643541293.jpg|width=100%]]|| || 경원군 이하전의 묘. || == 여담 == * 이하전이 죽을 때 그의 아내가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직접 달여줬다는 설이 있다. * [[흥선대원군]]이 [[맹인]]을 사주하여 이하전을 죽게 했다고 [[오해]]한 이상지란 사람이 한때 [[운현궁]]에 [[자객]]으로 침투하여 흥선대원군을 암살하려 했다. * 이름이 이'''하'''전이라서 본명이 이'''하'''응인 [[흥선대원군]]과 [[형제]]지간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이하전이 형인줄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아니고 실제로는 이하응이 이하전보다 '''22살 많은 24촌 할아버지''' 뻘이다.[* 이하응과 이하전의 가계는 덕흥대원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다. 이하응은 덕흥대원군의 11대손(12세손)이고 이하전은 13대손(14세손)이다.] 이하전은 흥선대원군의 손자들인 [[영선군]]([[흥친왕]]의 아들),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 [[의친왕]], [[영친왕]]([[고종(대한제국)|고종]]의 아들)과 같은 항렬이다. * 이하전의 부인과 모 [[절(불교)|사찰]]의 [[주지]] 간에 내연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사실이 아니며, 후일 소설가 유주현이 이 내용을 소설에 언급했다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 부인 서대혜는 [[대한제국]] 시기 계몽[[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1908년([[융희]] 2년)에는 양며느리 이씨[* 이하전 - 서대혜의 양자인 창산군 이해창의 부인.]와 함께 청진동에 양심여학교(養心女學校)를 세우고 자금을 적극 후원했다. 양심여학교는 이후 종친 [[이재극]][* 이하전에게는 아저씨 뻘 된다.]과 김인화가 설립한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에 합병되었다. 동덕여자의숙은 동원여자의숙과 다시 합쳐져 동덕여학교를 거쳐 현재 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가 되었다. * 만화 《[[맹꽁이 서당]]》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철종(조선)|철종]]이 아니라 똑똑한 이하전이 왕이 되었어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 헌종, 철종 시기 왕위 계승 유력 후보? == 세간에는 [[헌종(조선)|헌종]], [[철종(조선)|철종]] 시기에 이하전이 '''유력한''' 차기 왕위 계승 후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역모]] 사건에서 추대 대상'이었던 것과 '생전 활발한 활동을 한 [[왕족]]'이었다는 점, 또 '[[안동 김씨]]와 대척점에 있다 결국 그들 집권기에 젊은 나이로 사사당한 총명한 왕족'이란 점이 안타까움을 자아내서 그런 듯 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조선 왕실 직계와 촌수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저 둘은 실제 혈통으로는 [[덕흥대원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고 법적으로는 [[중종(조선)|중종]]의 아들 대에 갈라졌다.([[선조(조선)|선조]]가 [[명종(조선)|명종]]의 양자이기에.) 그래서 헌종과 실제로는 '''25촌'''(...), 법적으로는 '''27촌'''(...)이다. 굳이 설명이 더 [[必要韓紙|필요한지?]] 단, 그냥 [[덕흥대원군]]에서 갈라진 다른 사람이라면 논의 대상 자체가 아니었겠지만, 이하전의 경우는 특수했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 들어 왕실 자손이 거의 씨가 마르기 직전까지 가(...) 1819년(순조 19년) [[순조]]가 일종의 [[보험]] 개념으로 10대 사손 [[진안군 이언식]] 대 부터 '''대원군가 종손에 한해서''' 군 작위 수여 및 왕족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에서 [[대원군]]에 봉해졌던 사람은 4명이다.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 그런데 1819년 당시엔 [[철종(조선)|철종]], [[고종(대한제국)|고종]] 즉위 전이라 [[전계대원군|이광]]과 [[흥선대원군|이하응]]은 대원군이 아니었고[* 사실 이하응과 철종, 고종은 저 때 태어나지도 않았다.], 정원대원군은 원종으로 [[추존]]받아 법적으로는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덕흥대원군의 봉사손들만을 대상으로 내린 왕명이었다.] 13대 사손인 이하전은 [[종친부]]에서 관리하는 엄연한 왕족이었고 그래서 언급할 수 있는 대상이긴 했다. 그리고 이하전이 다른 [[종친]]들보다 유리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항렬]]'''. 원래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르면, 선왕의 다음 항렬 대에서 새 왕이 나와야하는데 그럴 왕족이 없긴 했다. [[헌종(조선)|헌종]]은 덕흥대원군의 13세손(12대손)이고 그 아랫대가 14세손(13대손)인데, 왕과 가까운 친척들 중 14세손은 '''단 1명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해당했던 왕족이 도정궁 종손 이하전이었던 것.[* 참고로 도정궁 계열을 제외한 왕실 종친 중에서 (아기 때 요절한 사람 제외하고)이하전과 같은 항렬의 왕손으로 처음 태어난 사람이 '''1868년 생''' [[완친왕|완친왕(완화군)]]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비록 왕통을 계승한 건 덕흥대원군의 셋째인 [[선조(조선)|선조]] 계열이었지만, 덕흥대원군의 장남 계열로만 계속 이어지는 종가가 바로 도정궁이기 때문에 왕실 직계보다 세대 진행이 빨랐기 때문이다.[* 이하전과 같은 항렬의 임금은 그보다 30여 년 뒤에 태어난 [[순종(대한제국)|순종]]이다. 그리고 [[전주 이씨#s-4.8.3|그와 같은 항렬('용(鎔)'자 돌림)]]이나 [[전주 이씨#s-4.8.4|한 칸 밑의 조카뻘 항렬('해(海)'자 돌림)]]을 보면, 현대의 인물이거나 심지어 [[네이버]]의 [[이해진]]이나 [[DL그룹]]의 [[이해욱]]처럼 [[2020년대]]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꽤 있다.] 어쨌든 그래서 실제로 헌종 사후 [[풍양 조씨]]와 뜻을 같이하던 권돈인이 직접 이하전을 후계자로 세우기를 호명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헌종과 같은 항렬의 왕손은 없냐고 할 수도 있다. 딱 2명 있었다. [[은신군]]의 증손자인 [[완림군|이재원]]([[흥선군]]의 형 [[흥녕군]]의 아들)과 [[흥친왕|이재면]](흥선군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헌종과 8촌이었지만, 실제로는 [[인평대군]]의 8대손이라 18촌이었으며(...) 더군다나 이재면은 불과 만 4살 밖에 안된 아주 어린 아이였다. 후술하겠지만 실제 핏줄 상으로는 헌종과 7촌인 이원범 형제에게 밀리고, 항렬로는 아랫 세대인 이하전에게 밀리고, 이래저래 애매하게 끼어서(?) 당시엔 아예 주목 대상조차 못되었다. --안습--] 그러나 이 때 [[헌종(조선)|헌종]]에게는 비록 [[항렬]] 상 숙부 뻘이긴 하지만 [[7촌]]인 [[영평군(1828)|이욱]]과 [[철종(조선)|이원범]]이 있었고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은 이들을 지지해 결국 [[철종(조선)|이원범]]이 즉위했다. 아무리 [[항렬]]이 중요하다해도 선왕 헌종과 '''7촌'''인 숙부와 '''25촌 - 27촌''' 조카 뻘 중에 누구한테 왕위를 물려줄 것인지는 더 말을 안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항렬이 역행해버린 이상 그 다음 왕위는 [[철종(조선)|철종]]의 조카 뻘이자 [[헌종(조선)|헌종]]의 형제 뻘이 즉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철종 재위기에 그 항렬 대의 왕손들은 꽤 있었기 때문에[* 철종 사망 당시 헌종과 동항렬인 왕족들은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덕안군|이재덕]], [[경은군|이재성]], [[완림군|이재원]], [[완영군|이재긍]], [[흥친왕|이재면]], [[고종(대한제국)|이명복]], [[인양군|이재근]] 등이 있었다.] 설령 이하전이 철종이 승하할 때까지 살아있었다해도 즉위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한다. == 매체에서 == * [[김봉근]][*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 [[박종규]] 전 대통령 경호실장 역을 맡았다.] - 1982년 [[KBS1]] 《[[풍운(KBS)|풍운]]》 ||<table width=450> [[파일:풍운 이하전.png|width=100%]] || || 《[[풍운(KBS)|풍운]]》의 이하전 || 철종의 원자가 죽자 [[이인응|경평군]](반문섭 분)에게 다음 보위를 준비하란 말을 듣지만, 손사레치며 [[흥선대원군|흥선군]]([[이순재]] 분)을 찾아가라고 한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하자 노들강가[* 지금의 [[노량진]] 일대 [[한강]]변.]에서 김순성(조재훈 분[* 《[[야인시대]]》에서 시대일보 편집국장 역을 맡았다. 배우 [[조향기]], 조기쁨의 아버지.]), 이긍선([[김시원]] 분[* 《[[태조 왕건]]》에서 [[능창#s-3|수달]], 《[[연개소문]]》에서 [[강이식]] 역을 맡았다.])과 술을 마시며 정치상황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는데 옆에 있던 하인이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민란을 부추긴 죄로 [[사약]]받아 죽는다. 이후 이상지(안병경 분)가 이하전의 죽음이 흥선군 책임이라 하여 흥선군을 죽이려다 실패한 장면도 나온다. * 정선일[* [[상도(드라마)|상도]]에서 [[순조]]를,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 [[김재익]] 경제수석을, 그리고 [[무신(드라마)|무신]]에서 주숙 역을 맡았다.] - 1990년 [[MBC]] 《[[조선왕조 500년]] - [[흥선대원군|대원군]]》 ||<table width=450> [[파일:경원군 이하전.jpg|width=100%]] || || 《[[조선왕조 500년]] - [[흥선대원군|대원군]]》의 이하전 || 전체적으로 나라의 안위와 종친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파락호 생활을 하던 [[흥선군]]([[임동진]] 분)을 찾아가 화를 내며 제대로 살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배 위에서 김순성([[정명환]] 분), 이긍선([[이재룡]] 분)과 술을 마시다 그들에게 반정을 권유받는데 [[뱃사공]]이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의금부]]로 잡혀가 [[사약]]을 마셨고 가솔들은 관노로 전락한다. 《[[풍운(KBS)|풍운]]》과 [[신봉승|작가]]가 같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두 작품의 묘사가 비슷하다. * [[이루(가수)|이루]] - 2020년 [[TV조선]] 《[[바람과 구름과 비]]》 ||<table width=450> [[파일:이루 이하전1.png|width=100%]] || || 《바람과 구름과 비》의 이하전 || 병약한 [[철종(조선)|철종]]([[정욱(1973)|정욱]] 분)이 종친에게 양위하려하자 [[신정왕후 조씨|조대비]]([[김보연]] 분)가 철종에게 데려와 인사시키는 것으로 첫 등장. 영리하고 야심도 큰 모습으로 나온다. 최천중([[박시후]] 분)과 [[흥선대원군|흥선군]]([[전광렬]] 분)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축출에 나섰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한다.[[http://broadcast.tvchosun.com/broadcast/program/1/C202000014/edit/9006.cstv|#]] 단, 몇 가지 [[고증오류]]가 있다. 극중에서 이하전이 경원군으로 불리는데 그의 군호는 1908년([[융희]] 2년)에 추증한 것이기 때문에 생전에는 경원군이 아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뻘인 흥선군을 형님, 종형으로 부른다.[* 형님 호칭은 봐줄 여지가 있다. 이하응은 이하전 고모([[완창군|완창군 이시인]]의 생가 누이)의 사위, 즉 고종사촌누나([[여흥부대부인]])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형(친척 형)으로 부른 건 확실히 틀렸다.] == 가족과 자손 == 부인은 앞서 언급한 달성군부인 서대혜(徐大慧)로 [[일제강점기]]인 1925년까지 살았다. 이하전이 사형당할 당시, 서대혜는 임신 중이었는데 자살 시도를 했으나 다행히 살았다. 하지만 꽤 오래 혼절하여 아이를 낳았는지 안 낳았는지, 만약 낳았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분명해졌고 이는 60년 뒤 [[도정궁]]에 큰 파란을 일으킨다. 자세한 것은 [[창산군#s-3.1|도정궁 친자 논란]] 참조. 공식적으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후사(後嗣)는 23촌 조카 뻘인 밀산군 이찬의 11대손 이봉길(이해창으로 개명)이 [[입양]]와서 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창산군]] 참조. [[분류:조선의 왕자군]] [[분류:도정궁 종주]] [[분류:1842년 출생]] [[분류:186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