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목차] ||<table width=662> [[파일:external/lh3.ggpht.com/p1000104.jpg|width=100%]] || == 개요 == {{{+1 景福宮 迎秋門}}} [[경복궁]]의 서문(西門)으로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불렸다. 주로 문무백관들이 이용했다. 고종 중건 당시 [[현판]]의 글씨는 허계[[http://sillok.history.go.kr/id/kza_10209017_002|#]](許棨, 1798 ~ 1866)가, 현재의 현판은 서예가 김충현(金忠顯. 1921 ~ 2006)이[[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1846|#]] 썼다. == 이름 == ‘영추’는 ‘가을(秋)을 맞아(迎) 서쪽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오행]]에서 서쪽은 [[가을]]을 나타내므로, [[경복궁]]의 서쪽 문에 ‘가을 추(秋)’ 자를 넣은 것이다.[[http://blog.daum.net/gobang53/8905758|#]] == 역사 == 1395년([[태조(조선)|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09029_006|#]] 1427년([[세종(조선)|세종]] 9년) 6월에 수리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005024_001|#]]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고종(대한제국)|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인 영추문 바로 앞에 [[서울전차|전차]] 선로가 부설되었다. 선로 위를 오가는 전차의 진동 때문에 1926년 4월 27일에 석축이 무너졌고[[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4280020920202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4-28&officeId=00020&pageNo=2&printNo=2024&publishType=00020|#]],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되었다. ||<table width=1000> [[파일:무너진 영추문1.png|width=100%]] || [[파일:무너진 영추문2.png|width=100%]] || |||| 무너진 영추문 석축 || [[8.15 광복|광복]] 이후 한동안 철거된 자리에 예전처럼 [[성문(건축)|성문]]이 아닌 3칸짜리 평대문이 놓여있었다. ||<table width=662> [[파일:복원 전 영추문.png|width=100%]] || || 복원 전 평삼문으로 있던 영추문 || 이후 1975년에 원래 자리보다 50m 북쪽으로 옮겨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때 1968년에 복원한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처럼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다.[*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6년 철거. 현재는 옛 방식대로 목조로 [[복원]]되어있다.] || [youtube(iJ9B34HTAnE)] || || 영추문 복원 준공을 다룬 [[대한뉴스]] || == 특징 == ● [[경복궁]]의 동문인 [[경복궁 건춘문|건춘문]]과 구조가 같다. * [[아치]]형 [[문]]을 낸 석축 위에 단층짜리 문루(門樓)를 올렸다. 문루 4면의 가장자리 앞에는 [[벽돌]]로 쌓은 통여장이 놓여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mun2014&logNo=220865736742&parentCategoryNo=&categoryNo=21&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List|#]] *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가 달려 있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전부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으며, [[추녀]]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이익공이다.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놓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문루의 내부는 전부 한 공간으로 트여있다. 가운데칸 [[천장]]은 구조가 다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가장자리 쪽 들보 위는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다. 문루의 바닥은 전부 [[벽돌|전돌]]을 깔았으나 가운데 칸만 [[마루]]를 깔았다. * [[아치]]형 [[문]]은 겉에만 아치를 구성하고 내부의 [[천장]]은 반자로 덮어 놓은 모습이다. 반자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고종 때는 기린(상상의 동물) 2마리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onho1202&logNo=221449226840|#]] 문짝은 붉은색 [[나무]][[판]]이며 문짝 위에는 문둔테를 두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mun2014&logNo=220865736742&parentCategoryNo=&categoryNo=21&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List|#]] * [[경복궁]] 안쪽 부분의 석축 양쪽에 문루로 올라갈 수 있는 [[암석|돌]] [[계단]]을 두었다. 계단에 [[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계단과 문루 사이의 통여장 가운데에는 [[벽돌|전돌]]을 쌓은 [[문]]을 두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mun2014&logNo=220865736742&parentCategoryNo=&categoryNo=21&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List|#]] == 여담 == *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고종(대한제국)|고종]] 31년) 7월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때 영추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물론 다른 문들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지만 특히 침전과 가까운 영추문에 공격이 집중되었다. 자세한 것은 [[청일전쟁#s-4|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항목 참조. *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때]]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을 빠져나갔다.[* [[경복궁 신무문|신무문]]이었다고도 한다.] * [[복원]] 후 한동안 닫혀있었다가 2018년 12월 6일에 개방되었다. [[경복궁]]에서 [[서촌]]을 가려는 위키러들은 영추문을 이용하면 훨씬 가깝게 갈 수 있으니 참조하자.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 [youtube(GDc2C8LXd_Q)] || || 영추문 개방을 다룬 [[JTBC]] 뉴스 || * 최근 일본에 있던 [[경복궁]] 영건일기를 분석한 결과 영추문 [[현판]]이 검은바탕 흰색글씨가 아닌 반대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207653|#]] * 영추문의 이명 중 하나가 바로 연추문(延秋門)인데, 다름아니라 [[정철]]의 [[관동별곡]]에 나오는 '연추문'이 바로 경복궁 영추문을 뜻한다.[[https://www.yna.co.kr/view/AKR20181206163700005|#]]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건춘문, version=3, paragraph=4)]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