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내정전)] [목차] ||<table width=800>[[파일:경복궁 교태전.jpg|width=100%]] || || 교태전 || == 소개 == {{{+1 景福宮 交泰殿}}} [[경복궁]]의 건물로 [[왕비]]의 정식 침전, 즉 [[중전|중궁전]]이다. [[임금]]의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강녕전]]의 [[북|북쪽]]에 있다. [[경복궁 광화문|광화문]]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심축의 제일 [[끝]]을 장식하는 건물이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사촌형이자 [[문신]]인 [[완림군|완림군 이재원]](1831 ~ 1891)이 썼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504012_004|#]] [[1990년대]] 초에 [[일제강점기]]에 만든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나온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현판과 같은 [[케이스]]. == 이름 == [[이름]]은 《[[주역|주역(周易)]]》의 64괘 중 '태괘(泰卦)'에서 유래했다. 태괘는 위에 [[음양|음(陰)]]을 상징하는 곤(坤,[[땅]]), 아래에 [[음양|양(陽)]]을 [[상징]]하는 건(乾, [[하늘]])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기|기운]]이 서로 내려가고 올라가면서 만나 [[교통|교통(交通)]]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왕]]([[남자]], 양)과 [[왕비]]([[여자]], 음)가 [[성관계|서로 잘 지내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이다. == 역사 ==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태조(조선)|태조]] 시절에 처음 지어졌으나 교태전은 [[세종(조선)|세종]] 연간에 건립하였다. 《[[세종실록]]》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209006_002|이 기사]]를 볼 때 1440년([[세종(조선)|세종]] 22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세조(조선)|세조]] 때에 [[신하]]들을 만나 [[정사|나랏일]]을 의논하기도 하고[[http://sillok.history.go.kr/id/kga_10501023_002|#]] 공적인 [[잔치]]도 열었던 것[[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4011_002|#]]을 보아 [[조선시대|조선 초기]]엔 편전의 역할도 겸하였던 것 같다. 1553년([[명종(조선)|명종]] 8년)에 [[화재]]로 불탄 후 2년 뒤 재건하였고 1557년(명종 12년)에는 처마를 보수하여 홑처마를 겹처마로 바꾸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1201014_003|#]]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 상태로 놓았다가 1867년([[고종(대한제국)|고종]] 4년)에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년)에 불타 다시 지었으나 1876년(고종 13년)에 또 불타고(...) 1888년(고종 25년)에 재건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때엔 귀빈관으로 쓰이다가 1917년 불타 없어진 [[창덕궁]] [[내전]]을 재건할 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면서 해체, 이전되어 지금은 [[창덕궁 대조전|대조전]] [[건물]]이 되었다. 이후 80년 가까이 빈 터로 남아 [[일본 제국|일제]]가 [[전국]] 각지에서 [[강제]]로 옮긴 [[석탑]], [[승탑|부도]] 등이 놓여 있다가 [[1990년대]] [[경복궁]] 종합 정비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youtube(9P3-H7XEGRA)] || || 경복궁 침전 복원 사업. 복원 중인 교태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 특징 == * [[영조]] 때 만든, [[조선시대|조선 초기]] [[경복궁]]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를 보면 [[경복궁 강녕전|강녕전]]과는 한 영역으로 묶여있고 강녕전의 부속 건물 [[경복궁 강녕전#s-4.1|연생전, 경성전]]과 [[복도]]로 이어져있다. 이는 완전히 영역이 떨어진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 [[파일:경복궁 전도 교태전 강녕전.png|width=100%]] || || 《경복궁전도》에서 묘사한 내전 영역 || * 정면 9칸, 측면 4칸의 1층[*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또한 [[암석|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기둥을 세운 뒤, 쇠서[* [[소]] [[혀]] 모양의 부재.]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기둥의 경우, 외진주는 네모나게, 내진주는 둥글게 하여[* 정면과 측면이 협칸 이상의 규모를 가질 때 바깥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열을 외진(外陣)이라고 하고, 그 기둥열을 외진주(外陣柱)라고 한다. 또한 안쪽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열을 내진(內陣)이라고 하고, 그 기둥열을 내진주(內陣柱)라고 한다.] 천원지방[* ‘[[하늘]](天)은 둥글고(圓) [[땅]](地)은 네모나다(方)’는 [[동양]]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사상]]을 나타내었다. [[경복궁 강녕전|강녕전]]과는 달리 중앙에 월대 없이 5단 짜리 계단만 3개를 설치했으며 뒷면에는 계단 한 개만 놓았다. 각 [[지붕]] 끝에는 [[정전]] [[경복궁 근정전|근정전]]처럼 [[잡상]]이 7개 올려져 있다. 교태전 정면에서 볼 때 [[대청]]에서 좌, 우로 3번째 칸 밑에 작은 [[아치]] 형 문이 있는데 이 문으로 들어가면 [[온돌]]을 땔 수 있는 함실 [[아궁이]]가 나온다. *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하였으며 [[천장]]은 우물 반자[*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로 막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의 정면 2칸, 측면 2칸을 [[온돌|온돌방]]을 두었으며 앞면의 협칸과 측면의 칸들을 모두 [[마루]]로, 뒷면의 협칸은 쪽방으로 구성했다. 온돌방의 경우, 대청 쪽의 칸은 1칸으로 통하여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하였고 또한 대청과 온돌방을 연결하는 문은 중앙에만 창호를 두고 그 위 아래로 [[종이]]를 바른 불발기[* [[종이]]를 두껍게 바른 장지문의 한가운데에 교살이나 완자 살을 짜 대고 창호지를 바른 [[문]].] [[양식]]으로 설치하였다. 원래 각 [[방]]의 장지문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창호지만 발라져있다. 단, 아미산으로 나가는 대청의 뒷 쪽 출입문에 2010년대 들어 [[십장생|십장생도]]를 그려넣어 보다 화려한 느낌을 준다. 원래 십장생에 없는 [[석류]]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다산]]을 상징한다고. ||<-2><table width=800> [[파일:교태전 대청.png|width=100%]] || ||<-2> 교태전 대청 || || [[파일:교태전 서온돌.png|width=100%]] || [[파일:교태전 동온돌.png|width=100%]] || || 교태전 서온돌 || 교태전 동온돌 || * [[시각|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교태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비]]의 침전의 경우 [[왕자|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국|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집|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덕수궁|경운궁]]의 침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 사실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만화카페|이거]] 아니다--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 == 여담 == * [[왕비]]는 평소에 [[음양]]의 원칙에 따라 서쪽 [[방]]에서 머물다가 [[왕]]이 올 땐 동쪽 방에서 합방했다고 한다. * [[자금성]]의 [[자금성#s-4.4.1.|교태전]]과는 [[한자]]까지 같다. 다만 자금성 교태전은 침전보다는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옥새]]를 보관하는 [[장소]]로 주로 쓰였다. == 부속 건물 == === 원길헌 === ||<table width=800> [[파일:원길헌.png|width=100%]] || || 원길헌 || {{{+1 景福宮 元吉軒}}} 원길헌은 동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으로, [[이름]] 뜻은 <[[주역|주역(周易)]]>의 '태괘(泰卦)'와 '곤괘(坤卦)'에서 유래했으며 ‘크게 선하여 길하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조선 초기]]엔 없었고 1867년([[고종(대한제국)|고종]] 4년) [[경복궁]] 중건 당시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역사]]는 교태전과 같다. 출입문 쪽 벽면은 전면창호가 아니라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었다. [[온돌|온돌방]]이 큰 [[방]] 3칸, 쪽방 3칸의 6칸, [[마루]]가 대청 2칸, 쪽마루 2칸의 4칸, 다 합쳐 총 10칸 규모로 되어있는데, 동쪽 [[대청]]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동쪽 행각의 일부를 포함하여 그 부분까지 합쳐 실제로는 온돌방 4칸[* 1칸은 쪽방.]을 더 활용할 수 있다. 건물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교태전 [[건물]] 안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기단]]의 높이가 교태전보다 한 단 낮아 건물 [[서열]]이 교태전보다 아래임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1890년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경복궁#s-5.3.6.|건청궁]]에 머물던 시기엔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일성록]]>엔 약원(藥院)들이 여기서 [[진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808001_002|#]] 이후 [[일제강점기]]이던 1917년 [[창덕궁]] 내전 재건 때 철거, 이전되어 원래의 원길헌은 흥복헌(興福軒)이 되어있다. 지금의 건물은 1995년 [[복원]]된 것이다. [[복원]]할 때 [[현판]]이 [[조선시대]] 원형과 달라 [[논란]]이 일었다. 옛 [[사진]]을 보면 흰 [[바탕]]에 짙은 [[글씨]][* 진한 청색인지 단순히 검은 색인지 알 수 없다.]로 되어있는데, 복원한 현재 모습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이기 때문이다. === 함홍각 === ||<table width=800> [[파일:함홍각.png|width=100%]] || || 함홍각 || {{{+1 景福宮 含弘閣}}} 함홍각은 교태전 서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이다. [[이름]]은 <[[주역|주역(周易)]]> '곤괘(坤卦)'에 나오는 ‘함홍광대(含弘光大)’에서 유래했으며 ‘포용하고(含) 너그럽다(弘)’는 뜻이다. [[역사]]와 [[건물]]의 구조는 원길헌과 동일하다. 단, 원길헌과 달리 북쪽에도 행각을 두었으며 남쪽 행각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 건순각 === ||<table width=800> [[파일:건순각.png|width=100%]] || || 건순각 || {{{+1 景福宮 健順閣}}} 건순각은 교태전 동북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이다. [[이름]]은 <[[주역|주역(周易)]]>에 나온 건괘(乾卦)는 굳건하고(健: 건)과 곤괘(坤卦)는 순하다(順: 순)는 의미의 ‘건건곤순(乾健坤順)’에서 유래했다. 역사는 원길헌, 함홍각과 같다. 평면이 ‘ㄱ’자로 되어있으며 교태전과 이어지는 쪽은 [[누각|누각형]] [[마루]]로 되어있어 아랫쪽에 기단이 없고 [[암석|돌]]기둥으로 받쳐져있는데 그렇게 길지 않은 높이이다. 그 옆으로 [[온돌|온돌방]]을 2칸 놓았으며 그 북쪽에 마루 2칸을, 그리고 마루방 옆에 온돌방을 2칸 놓았다. 건물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교태전 [[건물]] 안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현판]]은 건물의 서북쪽, 아미산을 바라보는 면에 있으며 1995년 [[복원]]되었는데 [[현판]]이 [[조선시대]] 원형과 달라 [[논란]]이 일었었다. 옛 [[사진]]을 보면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있는데, 복원한 현판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0년대]] 말에 원래 색대로 복원하였다. KBS 사극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대왕대비전으로 나오는 전각이다. === 함원전 === ||<table width=800> [[파일:경복궁 함원전.jpg|width=100%]] || || 함원전 || {{{+1 景福宮 含元殿}}} 교태전의 부속 [[건물]]로 창건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세종(조선)|세종]]이 궁궐 내 [[절(불교)|불당(佛堂)]]을 설치해 [[불교]] [[행사]]를 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 연간에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역사]]는 교태전과 같다. 이름은 ‘원기(元)를 간직(含)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당나라]]에도 같은 이름의 [[궁전]]이 있었다. [[암석|장대석]]을 세 단 쌓은 [[기단]] 위에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정면 6칸, 측면 4칸의 총 24칸으로, 이익공 [[양식]]으로 지어졌고, 창방[* 공포가 구성되는 목조 건축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건축 부재.] 위로 화반[* 공포대의 주간을 구성하는 건축 부재로 주로 주심포식 공포와 익공식 짜임에서 사용한다.]과 운공[* 이익공 건물에서 화반 윗 부분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건축 부재.]을 설치하였다. 남쪽 가장자리 칸 전체를 [[마루|툇마루]]로 놓고 중앙의 4칸을 [[대청]]으로 둔 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쪽 4칸을 [[온돌|온돌방]]으로 꾸몄다. 북쪽 가장자리 칸의 경우, 온돌방 쪽은 쪽방으로, 대청 쪽은 툇마루로 두었다. 한 때 [[중종(조선)|중종]]이 [[경복궁 경회루|경회루]]와 [[경복궁 근정전|근정전]]처럼 함원전의 [[지붕]]도 [[청기와]]로 올리도록 하였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512018_002|#]] 실제로 올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판]]의 글씨는 1888([[고종(대한제국)|고종]] 25)년에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낸 [[문신]] 이명재(李命宰, 1838 ~ 1895)가 썼으며 1995년 함원전을 다시 지을 당시 예전에 쓰던 현판을 [[복원]]하여 걸었다. == 아미산 == ||<table width=800> [[파일:아미산 꽃.png|width=100%]] || || 아미산의 [[봄]].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다. || {{{+1 峨嵋山}}} 교태전의 [[정원|후원]]에 있는 [[인공]][[산]]으로 [[태종(조선)|태종]] 시절 [[경복궁 경회루|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들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의 흐름을 [[경복궁]]까지 이어 [[백두산]]의 [[기]]를 받으라는 상징적인 뜻이 담겨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이 기를 받을 사람을 [[왕비]]가 교태전에서 낳는 [[왕세자]]와 [[대군]], [[공주]]들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아미산이 처음 조성될 때는 교태전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 기운을 받으라는 의미로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이름]]은 [[중국]] [[불교]]와 [[도교]]의 [[성지]] 중 하나인 아미산에서 따왔다. 그 [[산]]이 [[산둥성|산둥성(山東省)]] 박산현에 있는 산인지 [[쓰촨성|쓰촨성(四川省)]] 아미현의 산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교태전 [[건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인공]][[산]]이라 그런지 높이는 대체로 평평한 편이다. 2벌대의 [[암석|장대석 석축]]을 쌓아 4단의 화계(花階)를 만들어 괴석과 [[함]]같이 생긴 돌 [[연못]] 두 개를 놓고 나무와 [[꽃|화]][[풀|초]]들을 심어 화려하면서도 운치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는 총 13종이 심어져있는데 그 중 [[소나무]], [[회화나무]], [[감나무]], [[말채나무]]가 주를 이룬다. === 낙하담과 함월지 === ||<table width=800> [[파일:낙하담과 함월지2.jpg|width=100%]] || || 왼쪽이 낙하담, 오른쪽이 함월지이다. || {{{+1 落霞潭 · 涵月池}}} 아미산에 있는, 마치 [[함]]처럼 생긴 [[암석|돌]] [[연못]]들로 말이 연못이지 사실상 [[수조]]이다. 낙하담이 동쪽에, 함월지가 서쪽에 있다. 낙하담(落霞潭)은 ‘[[노을]]이 내려 앉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낙하(落霞)’는 ‘떨어지는 노을’, 또는 ‘[[저녁]] 노을’이라는 의미이다. [[중국]] [[남북조시대|남조시대]] 때 [[소량|양나라]]의 [[황제]]였던 [[간문제(양)|간문제]]가 지은 ‘등성(登城)’이라는 [[시]]에 “저녁 노을은 금방 이어졌다 끊어지고, 저녁 물결은 때마침 다시 돌아오네.”라는 표현에서 유래했다. 또한 초당사걸[* [[중국]] [[당나라]] 초기([[7세기]])의 중국 시단을 대표한 네 명의 [[시인(문학)|시인]].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이다.] 중 한 사람인 [[시인(문학)|시인]] 왕발--[[왕발(야인시대)|얘]] 말고--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에도 “저녁 노을(落霞)은 외로운 따오기와 함께 날고, 가을 물은 먼 하늘과 함께 한 가지 색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훨씬 유명하기에 여기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함월지(涵月池)는 ‘달을 머금은 연못’이라는 뜻으로, [[달]]이 [[암석|돌]] [[연못]]의 [[물]] 속에 비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아미산이라는 공간과 연관시켜 보면 [[이백]]의 <아미산월가>에 나오는 “아미산에 떠 오른 [[가을]] [[밤(시간)|밤]]의 [[반달]]이여, [[달]] [[그림자]] 평강에 들고 [[강|강물]]은 흘러가네.”라는 구절에서 따온 듯하다. === 굴뚝 === ||<-5><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bg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801~10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width=30%> 810호 ||<|2> ← ||<width=30%> '''811호''' ||<|2> → ||<width=30%> 812호 || || [[경복궁 자경전#s-5.2|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 || '''경복궁 아미산 굴뚝''' || [[경복궁 근정문|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315288><tablebordercolor=#315288><bgcolor=#fff>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811호}}}]]''' || ||<-2> {{{#fff {{{+1 '''경복궁 아미산 굴뚝'''}}}[br]{{{-1 景福宮 峨嵋山 굴뚝}}}}}}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경복궁 아미산, 너비=100%, 높이=100%)]}}}|| ||<width=80> '''{{{#fff 소재지}}}''' ||<bgcolor=#fff>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 '''{{{#fff 분류}}}''' ||<bgcolor=#fff>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주거시설 || || '''{{{#fff 수량}}}''' ||<bgcolor=#fff> 4기 || || '''{{{#fff 지정연도}}}''' ||<bgcolor=#fff> 1985년 1월 8일 || || '''{{{#fff 제작시기}}}''' ||<bgcolor=#fff> [[조선시대]], 1867년 || || [[파일:아미산 굴뚝.jpg|width=100%]] || || 아미산 굴뚝 || 아미산하면 4개의 [[굴뚝]]이 제일 유명하다. 교태전의 [[온돌|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내보내기 위해 만든 굴뚝이다. 육각형이다. [[화강암]] 받침돌 위에 [[황토|황토색]] [[벽돌]]로 30단 정도를 쌓아 몸체를 만들었다. 몸체의 윗 부분은 소로와 창방 · 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다. 맨 위에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가(煙家)를 [[점토]]로 만들어 두었다. 또한 각 면마다 [[봉황]] · [[두루미|학]] · [[박쥐]] · [[해치]] · [[사슴]] · [[대나무]] · [[소나무]] · [[국화]] · [[매화]] · · [[불로초]] 등의 문양을 구운 [[벽돌]]로 집어넣고, 무늬 사이사이에 석회를 넣었다. [[굴뚝]] 4개 중 3개는 나란히 놓여있지만 1개는 동북쪽 끄트머리에 건순각의 출입문인 건순문과 거의 붙어있다시피 있다. 교태전 일곽의 [[건물]]들은 전부 1995년에 [[복원]]한 것이지만, 이 굴뚝은 [[1860년대]] [[고종(대한제국)|고종]] 시절의 모습 그대로이다. 거기에다 미적 [[가치]] 등이 뛰어났기에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아미산을 둘러싼 [[담|담장]]에도 [[황토|황토색]] [[벽돌]]로 격자무늬를 내고 [[꽃]] 문양을 장식하였다. 이는 [[굴뚝]]과 조화를 이룸과 동시에,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담장을 [[예술]] 그 자체로 [[승화]]시키는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 대중매체에서 == ||<table width=650>[[파일:명성황후 8화의 대조전.png|width=100%]]|| ||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 8화에 나온 교태전. [[창덕궁 대조전|대조전]]으로 현판을 바꿔 촬영했다. || *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중궁전으로 많이 나왔다. 희한하게 배경이 [[창덕궁]]일 때에도 나왔는데, [[창덕궁 대조전|창덕궁의 대조전]]이라고 현판을 바꾸거나(...) 아니면 [[고증]]을 무시하고 교태전 [[현판]] 그대로 달고 나온다. 아미산 쪽 뒷면은 대비전으로 나온 경우가 많았다. *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드라마)|킹덤 2]]》에서는 [[상궁]]이 이곳에 [[좀비]]들을 풀어놓는다. * [[조선]] [[왕궁]]을 재현한 [[전라북도]] [[부안군|부안]]의 부안영상테마파크와 [[경상북도]] [[문경시|문경]]의 《[[대왕세종]]》 세트장에 각각 교태전 세트가 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강녕전, version=10, paragraph=3, title2=경복궁, version2=879, paragraph2=5.3.1)]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