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align=center><table width=500><#fff> [[파일:강동6주.png|width=100%]] || || '''강동 6주(江東 六州)의 위치.''' || [목차] == 개요 == [[여요전쟁|거란의 1차 침입]]시에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가 [[청천강]] 이북, [[압록강]] 남쪽에 확보한 영토. 거란은 뒤늦게 영토의 군사적 중요성[*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에 비견할 만한 고려의 북방방어선이다. 2/3차 침입에서 이곳을 함락하지 못하고 그냥 통과해서 개경으로 진격한 요나라군의 발목을 잡다못해 본국으로 퇴각하는 요나라군을 공격해 엄청난 피해를 입힌다.]을 깨닫고 돌려주길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거절하였고 이후 11세기 내내 이어진 거란과 고려 간의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려의 북진정책을 대표하는 결과물이며 세치의 혀를 통해 평화적[* 엄밀하게는 평화적이 아니다. 애당초 이 지역은 거란의 영토도 아니었다. 거란의 개입을 막고 무력으로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토벌해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으로 영토를 얻은 사례로 국내외에 유명하다. 국사책에서도 중요하게 다룬다. == 상세 == [[성종(고려)|고려 성종]] 12년인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성종은 상중하 3군을 편성하고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고려)|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대비하게 하였다. 또한 성종은 친히 [[서경]]을 거쳐 [[안북부]]까지 나아가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봉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배하자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의 영토를 떼어주자는 의견이 득세하였다. 그럼에도 안융진 전투에서 [[대도수]]의 활약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자 성종은 서희 및 [[이지백]]의 건의를 받아들여 협상 노선을 채택하였다. 고려 측 협상자로서 거란 진영으로 간 [[서희]]가 뻔뻔한 태도로 침대에 누워버리며 소손녕의 기선을 제압하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므로 오히려 거란이 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희는 조공 문제를 따지는 [[소손녕]]에게 [[여진족|여진]]이 길을 막고 있으니 그들을 쫓아내고 압록강 하구 일대의 통제권을 주면 거란과 친하게 지내겠다는 말로 압록강 동쪽의 영토를 얻어내었다. 이렇게 고려는 거란에게 조공하는 대가로 안북부부터 압록강에 이르는 280리의 땅을 얻고 '''흥화진, [[용주#s-3]], [[철주#s-1.2]], 통주, 곽주, [[귀주]]'''를[* 현재의 지명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흥화-[[의주군]], 용-[[용천군]], 철-[[철산군]], 통-[[선천군]], 곽-[[곽산군]], 귀-[[구성시]]] 설치하니 이것이 실리 외교의 대명사인 강동6주인 것이다. == 관련 문서 == * [[4군 6진]] * [[동북 9성]] * [[박양유]] * [[서희]] * [[성종(고려)|고려 성종]] * [[소손녕]] * [[여요전쟁]] * [[성종(요)|요성종]] * [[연운 16주]] * [[이지백]] * [[천리장성#s-3|천리장성]] [각주] [[분류:지명]][[분류:고려(초기)]][[분류:고려-거란 전쟁]]